1. 쾰른시대의 행위 음악
1956년 일본 동경 대학을 마치고 독일에 도착한 백남준은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 강좌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존 케지를 만나게 된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음악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찼던 백남준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
존 케이지는 실험적인 신음악을 추구하던 백남준에게 우연, 침묵, 비결정성 등 새로운 음악적 이론과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 매체 공연을 제시한 운명적 인물이다.
-쾰른 시대의 최초의 해프닝
백남준은 1959년 11월 장피에르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22번가 화랑에서 <케이지에게 보내는 찬사: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란 그의 선구적 행위음악을 선보인다. 이 음악은 각종의 소리를 만드는 무대 위의 행위들, 즉 깡통을 발로 차서 그것이 유리판을 깨게 하고, 그 유리는 다시 계란과 장난감 자동차를 치게 하고는, 피아노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하는 백남준 자신의 음악 행위들과, 그 소리를 동반하는 다양한 녹음 테이프 재생 소리들로 엮어지는, 행위와 소리의 앙상블이었다.
무대 위의 소리들이 산 수탉의 꼬꼬댁 소리와 오토바이의 브르릉 소리와 함께 생소리를 창출하는가 하면, 녹음기는 베토벤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에 시끌벅적한 복권 당첨소리, 장난감 소리 사이렌 소리까지 재생시켰다. 결국 그의 행위 음악은 소리를 만드는 행위와 장치들로 구성된다.
백남준의 행위음악은 케이지의 소음음악이 그렇듯, 소리는 그것이 음악이건 잡음이건 침묵이건, 그것이 또한 생소리건 재생된 소리건, 청각적 경험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나아가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극단적 행위는 관객을 자극하여 관객 참여를 조장하기 위한 예술적 고안이었다.
이 작품에서 소리를 압도하는 그의 충격적 행위가 바로 백남준 예술을 케이지나 다른 동료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백남준은 상기 작품을 위한 테이프 제작에서 일종의 콜라주 수법으로 각종의 소리를 발췌, 편집하였다. 이것은 1952년 케이지가 그의 최초 녹음 테이프 콜라주 작품인 <윌리엄 믹스>를 선보인 이래 다수의 전위 음악가들이 테이프를 이용한 작품을 시도하였다.
1960년대의 작품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은 그의 행동 음악의 충격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 쾰른 시대의 걸작이다. 공연 중 피아노로 쇼팽을 연주하던 백남준이 갑자기 관중석에 내려와 관람하고 있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그 옆에 앉아 있던 튜더에게 삼푸 세례를 한 후 조용히 사라졌다가, 금방 술집에서 전화로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던 이 해프닝은 해프닝 사상 가장 전설적인 일화로 남는다.
이 행위의 의미는 첫째, 백남준이 넥타이를 자르는 과격한 행위를 통하여 서구 문명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에 도전한다.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 발상이 피아노의 외양이나 소리를 조작, 왜곡시킴으로서 피아노의 권위, 즉 서구의 음악 전통과 고전의 위엄을 손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무대를 관중석까지 확장하고 관중을 작품의 필연요소로 포함시키며, 또한 백남준은 공연 중 객석으로 진출함으로써, 시간, 장소, 행위를 모두 비고정적 상황으로 바꾸기 위함이다.
백남준이 말하는 음악은 관객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관계란 관객이 음악을 감상한다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관객이 음악활동에 참여한다는 상호적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재래적 예술관은 부재되며, 우연으로 예술을 만들고 예술가는 일개 무명의 수행자일 뿐이다.
백남준의 행위 음악은 듣는 음악인 동시에 보는 음악이다. 음악의 전시회라는 그 자신의 전시회 이름처럼, 청각과 시각, 또는 시간과 공간 예술의 복합매체를 수행한다.
2.플럭서스 해프닝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써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명명하고 조직하였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플럭서스 운동은 이후 베를린·뒤셀도르프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뉴욕·파리·런던·스톡홀름·프라하·일본 등 유럽·미국·아시아 등지로 빠르게 파급되어 전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플럭서스는 예술의 장르적 구분을 탈피하여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드는 복합 매체 성향의 예술가들의 느슨한 모임이었다. 플럭서스는 인생과 삶에 직결되는 삶의 예술을 지향하고 관념보다는 행위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택했다. 다다 정신과 가까운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플럭서스는 백남준의 활동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키는데 모체가 된다.
백남준의 행위음악은 플럭서스 해프닝의 집단 적 성격 속에서 더욱 체계화된다.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의 역사가 되는 1963년의 작품<음악의 전시회-전자텔레비전>에서 장치된 피아노 3대와 장치된 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 머리를 전시하였던 문제의 전시회-----이것을 통하여 관객을 일깨우고 관객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고자 하였다.
플럭서스에서의 해프닝은 드라마틱해지고, 애로티시즘을 도입하는데 그 충격효과는 더욱 첨예화된다. 1965년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에서 무어맨이 등장하게 되는데, 무어맨은 바하의 <첼로 조곡 제 3 번>의 연주와 옷 벗기를 교대로 하여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계속한다. 같은 해의 <생상스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 무어맨은 좀 더 과격한 행위를 감행한다.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 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다시 연주를 계속한다. 그후 1967년<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무어맨은 과도한 노출로 결국 체포된다.
이러한 극심한 에로티시즘의 의미는 무엇인가? 백남준은 다다정신에 애로티시즘을 도입하기를 원했다. 시각예술에서와는 달리 음악에서는 성적인 영역이 개발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백남준은 음악에 누드를 도입하여 음악의 시각화 작업을 완수하려한 것이다. 또한 이런 직설적인 노출을 통하여 관객의 참여를 유발하는 참여예술을 실현시키고자한 것이다.
출처: 백남준과 그의 예술:해프닝과 비디오아트/김홍희 지음/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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