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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애스콧 Interview

조회 수 8308 추천 수 0 2010.04.19 22:37:33


“사이버네틱스의 창조적 생명성을 찾아”

당신은 60년대부터 ‘사이버네틱스’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즈음과 그 후의 활동에 대하여 묻고 싶다.

60년대에 예술계의 관심은 플럭서스와 퍼포먼스 등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성에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학생이었고 후기인상파인 세잔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이동하는 시점과 자연 속의 유전(流轉)과 같은 주제에 탐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세잔의 구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유전하고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감상자측인 것이다. 또한 그 시기에 나는 F. H. 조지의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로잔 브래트의 ‘인지(認知)’라는 발상에 근거해 신경망의 극히 초기적 구상을 바탕으로 뇌의 모델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전개했다. 이 이론은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사이버네틱스라는 과학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일생에 몇 번 있을까말까 한 영감을 얻고, 예술 발전의 기초가 될 씨앗으로서의 이론적인 근거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사이버네틱스의 모든 영역에 뛰어들어 참가와 인터액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60년대에 관심을 가졌던 사이버네틱스가 실제로는 거의 미개척 분야였던 것처럼, 바이오 텔레마틱이나 나노테크놀러지, 모이스트 미디어, 그리고 재물질화와 같은 영역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가 활동하게 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한다.

그후에 당신이 기획한 <텍스트의 주름>(1983)과 <가이아의 양상〉(1989)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디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80년대에 들어 <Terminal Consciousness>에 참여한 뒤, F. 포페르로가 기획한 <엘렉트라>에서 작품제작을 제의받았다. 프로젝트의 타이틀인 ‘텍스트의 주름’은 롤랑 바르트에서 유래한다. 즉, 바르트가 말한 ‘텍스트의 쾌락=pleasure’로부터 ‘텍스트의 주름=plissure’에 도달하게 된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가 60년대로 되돌아가서 예술작품에 있어 감상자는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감상자와 작품의 상호작용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투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전세계에 작가를 배분하고, 전지구적인 동화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했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답이 된 것은 1989년의 <아르스 엘렉트로니카>에서의 시도였다. 곡선 형태의 건물과 화단 밑의 터널이라는 공간을 사용하여 <가이아의 양상>이라는 프로젝트를 행하였다. 테마는 시공간의 만곡과 가이아(GAIA), 즉 대지의 여신이다. 나는 먼저 전세계의 1백명 이상의 예술가·시인·과학자·샤먼·음악가·건축가·호주 원주민·미국 인디언 예술가들에게 지구에 관한 화상이나 텍스트·시를 보내줄 것을 의뢰했다.

이 행사에 마련된 인터페이스는 2종류였다. 하나는 전시회장의 2층에 수평으로 늘어선 일련의 스크린으로, 관객들은 마치 대지를 내려보듯이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스크린에는 네트워크로부터 내려받은 화상이 투영되고, 관객은 마우스를 이용해서 그 화상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거나, 목소리에 반응하는 노이즈 센서를 이용해서 화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전부 수작업으로 화상을 보내거나 지우고, 변조된 화상을 원래의 것으로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터페이스는 ‘가이아의 자궁’이라고 불리는 데이터 터널이었는데, 건물의 화단 밑에 철도의 선로를 깔고, 관객은 정신과 의사가 사용하는 긴 의자에 환자처럼 누워서 암흑 속을 이동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에게는 40개의 전광판에 시와 정치적인 텍스트가 스크롤되는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세계에서 보내오는 갖가지 텍스트 속을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주고받는 정보의 통합체가 또 하나의 생명체라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 20세기에 들어 과학과 테크놀러지는 예술을 혁신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당신은 이를 통하여 예술의 컨텐츠의 성격과 내용까지 변하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관련해서 예술의 미래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애스콧: 테크놀러지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환경이다. 또한 테크놀러지는 욕망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강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텔레파시로 의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늘 지녀오던 것이었다. 고대문명이나 현대의, 예를 들면 브라질의 샤먼도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텔레프레젠스를 송신할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아전인수격의 설명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에 스크린 위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 인공생명을 내포한 실리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매체는 변화하고 있고 환경 또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정신, 즉 무엇인가를 실현 혹은 이해하고 스스로 변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세기 디지털 아트의 흐름을 개관할 때, 그 기원은 오히려 뒤샹이나 마리네티와 같은 사람들의 고유한 의미와 접근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는 극히 광범위한 갖가지 전략을 창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3개의 기본적인 미학적인 좌표가 있다. 그중 하나는 테크노에틱스인데, 이것은 의식의 테크놀러지와 내가 사이버셉션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인공생명, 이것은 자연의 창발(創發)과정을 적용하는 모든 것, 마투라나와 발레라가 오토포에시스라고 부르는 과정의 모든 구체적인 예를 포함한다.

세 번째로 인텔리전트 건축, 즉 적응과 예측을 행할 수 있는 인공의식을 지닌 환경시스템 내지 구조에 관련된 모든 것, 이것들은 첨단 과학의 연구에도 중심이 되는 문제다. 거기에는 의식의 문제가 모든 측면에서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과학적인 은유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

금세기의 서양예술은 테크노에틱 문화에의 길을 구축해 왔다. 뒤샹의 아이러니한 과학만능주의로부터, 타틀린의 공학적 낙관주의,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기술적인 역동주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예술의 근저를 이루는 창조행위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은유에 대한 찬미와 테크놀러지의 잠재력에 대한 신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컴퓨터 과학과 첨단기술이 예술의 실천에 가져온 충격이나, 양자물리학 또는 사이버네틱스의 은유가 예술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끼친 영향은 재삼 거론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현재 테크놀러지 자체가 생물공학이나 생체전자공학과 같은 생물학에의 지향성을 강화해감에 따라, 예술 또한 스스로 발생이나 공진화(共進化) 혹은 오토포에시스의 문제를 내포하게 되었다.

인공생명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생명은,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진 콘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는 형태로 파악된다. 거기서 생명이란 조직화된 물질의 특성이기보다는, 물질의 조직화 그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인공생명의 핵심이 되는 개념은 창발적인 몸짓 (behavior) 이다. 자연의 생명은 방대한 양의 무생명체인 분자가 행하는 조직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창발한다.

C.랭턴에 의하면, 거기에 전체적인 컨트롤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부분의 ‘몸짓’ 전체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부분이 ‘몸짓’ 그 자체이며, 개개의 ‘몸짓’의 국소적인 상호작용의 전체로부터 창발되는 몸짓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으로서의 인공생명과 상호작용적 예술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어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샤머니즘적 의미론과 ‘벌레구멍’의 은유에 대하여 말해달라.

고대의 무당은 일종의 의식의 벌레구멍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의 장벽을 마음대로 넘어다닐 수 있었다. 이 은유는 고대 샤머니즘 전통에서의 예술의 기원을 오늘날 인터넷에 있어서의 예술 내지 미래의 시공 항해에서의 예술과 연결지을 것이다. 텔레마틱한 링크 내지 인터넷과 같은 하이퍼 미디어에 있어서 현대의 우리들은 벌레구멍을 통하여 갖가지 사이트나 노드(node, 매듭·파절·중심점)로 간편하게 드나들 수 있고, 이미지나 텍스트·장소나 사람들 사이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벌레구멍이란, 양자(量子)의 껍질(막)을 관통하는 터널이며, 공간의 토폴로지에 있어 아득히 떨어진 우주공간의 두 장소를 이어주고, 또 다른 조작을 하면 하나의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혹은 현실의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사람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양자의 껍질을 관통하는 터널’이란 이론적인 가설일 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웹(web)에 있어서 내가 데이터의 껍질이라고 부르고 있는 터널을 통하여 하이퍼 링크된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하나의 텔레프레젠스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 나아가서는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이동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벌레구멍과 같은 터널을 통한 이동은 거시적인 우주와 미시적인 의식이라는 두 개의 레벨에 있어 ‘몸짓’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는 은유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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