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프랙탈 이야기들

작가와 함께한 프랙탈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2010.04.19 22:37

로이 애스콧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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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의 창조적 생명성을 찾아”

당신은 60년대부터 ‘사이버네틱스’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즈음과 그 후의 활동에 대하여 묻고 싶다.

60년대에 예술계의 관심은 플럭서스와 퍼포먼스 등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성에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학생이었고 후기인상파인 세잔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이동하는 시점과 자연 속의 유전(流轉)과 같은 주제에 탐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세잔의 구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유전하고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감상자측인 것이다. 또한 그 시기에 나는 F. H. 조지의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로잔 브래트의 ‘인지(認知)’라는 발상에 근거해 신경망의 극히 초기적 구상을 바탕으로 뇌의 모델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전개했다. 이 이론은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사이버네틱스라는 과학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일생에 몇 번 있을까말까 한 영감을 얻고, 예술 발전의 기초가 될 씨앗으로서의 이론적인 근거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사이버네틱스의 모든 영역에 뛰어들어 참가와 인터액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60년대에 관심을 가졌던 사이버네틱스가 실제로는 거의 미개척 분야였던 것처럼, 바이오 텔레마틱이나 나노테크놀러지, 모이스트 미디어, 그리고 재물질화와 같은 영역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가 활동하게 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한다.

그후에 당신이 기획한 <텍스트의 주름>(1983)과 <가이아의 양상〉(1989)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디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80년대에 들어 <Terminal Consciousness>에 참여한 뒤, F. 포페르로가 기획한 <엘렉트라>에서 작품제작을 제의받았다. 프로젝트의 타이틀인 ‘텍스트의 주름’은 롤랑 바르트에서 유래한다. 즉, 바르트가 말한 ‘텍스트의 쾌락=pleasure’로부터 ‘텍스트의 주름=plissure’에 도달하게 된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가 60년대로 되돌아가서 예술작품에 있어 감상자는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감상자와 작품의 상호작용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투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전세계에 작가를 배분하고, 전지구적인 동화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했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답이 된 것은 1989년의 <아르스 엘렉트로니카>에서의 시도였다. 곡선 형태의 건물과 화단 밑의 터널이라는 공간을 사용하여 <가이아의 양상>이라는 프로젝트를 행하였다. 테마는 시공간의 만곡과 가이아(GAIA), 즉 대지의 여신이다. 나는 먼저 전세계의 1백명 이상의 예술가·시인·과학자·샤먼·음악가·건축가·호주 원주민·미국 인디언 예술가들에게 지구에 관한 화상이나 텍스트·시를 보내줄 것을 의뢰했다.

이 행사에 마련된 인터페이스는 2종류였다. 하나는 전시회장의 2층에 수평으로 늘어선 일련의 스크린으로, 관객들은 마치 대지를 내려보듯이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스크린에는 네트워크로부터 내려받은 화상이 투영되고, 관객은 마우스를 이용해서 그 화상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거나, 목소리에 반응하는 노이즈 센서를 이용해서 화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전부 수작업으로 화상을 보내거나 지우고, 변조된 화상을 원래의 것으로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터페이스는 ‘가이아의 자궁’이라고 불리는 데이터 터널이었는데, 건물의 화단 밑에 철도의 선로를 깔고, 관객은 정신과 의사가 사용하는 긴 의자에 환자처럼 누워서 암흑 속을 이동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에게는 40개의 전광판에 시와 정치적인 텍스트가 스크롤되는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세계에서 보내오는 갖가지 텍스트 속을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주고받는 정보의 통합체가 또 하나의 생명체라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 20세기에 들어 과학과 테크놀러지는 예술을 혁신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당신은 이를 통하여 예술의 컨텐츠의 성격과 내용까지 변하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관련해서 예술의 미래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애스콧: 테크놀러지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환경이다. 또한 테크놀러지는 욕망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강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텔레파시로 의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늘 지녀오던 것이었다. 고대문명이나 현대의, 예를 들면 브라질의 샤먼도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텔레프레젠스를 송신할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아전인수격의 설명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에 스크린 위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 인공생명을 내포한 실리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매체는 변화하고 있고 환경 또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정신, 즉 무엇인가를 실현 혹은 이해하고 스스로 변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세기 디지털 아트의 흐름을 개관할 때, 그 기원은 오히려 뒤샹이나 마리네티와 같은 사람들의 고유한 의미와 접근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는 극히 광범위한 갖가지 전략을 창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3개의 기본적인 미학적인 좌표가 있다. 그중 하나는 테크노에틱스인데, 이것은 의식의 테크놀러지와 내가 사이버셉션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인공생명, 이것은 자연의 창발(創發)과정을 적용하는 모든 것, 마투라나와 발레라가 오토포에시스라고 부르는 과정의 모든 구체적인 예를 포함한다.

세 번째로 인텔리전트 건축, 즉 적응과 예측을 행할 수 있는 인공의식을 지닌 환경시스템 내지 구조에 관련된 모든 것, 이것들은 첨단 과학의 연구에도 중심이 되는 문제다. 거기에는 의식의 문제가 모든 측면에서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과학적인 은유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

금세기의 서양예술은 테크노에틱 문화에의 길을 구축해 왔다. 뒤샹의 아이러니한 과학만능주의로부터, 타틀린의 공학적 낙관주의,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기술적인 역동주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예술의 근저를 이루는 창조행위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은유에 대한 찬미와 테크놀러지의 잠재력에 대한 신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컴퓨터 과학과 첨단기술이 예술의 실천에 가져온 충격이나, 양자물리학 또는 사이버네틱스의 은유가 예술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끼친 영향은 재삼 거론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현재 테크놀러지 자체가 생물공학이나 생체전자공학과 같은 생물학에의 지향성을 강화해감에 따라, 예술 또한 스스로 발생이나 공진화(共進化) 혹은 오토포에시스의 문제를 내포하게 되었다.

인공생명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생명은,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진 콘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는 형태로 파악된다. 거기서 생명이란 조직화된 물질의 특성이기보다는, 물질의 조직화 그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인공생명의 핵심이 되는 개념은 창발적인 몸짓 (behavior) 이다. 자연의 생명은 방대한 양의 무생명체인 분자가 행하는 조직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창발한다.

C.랭턴에 의하면, 거기에 전체적인 컨트롤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부분의 ‘몸짓’ 전체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부분이 ‘몸짓’ 그 자체이며, 개개의 ‘몸짓’의 국소적인 상호작용의 전체로부터 창발되는 몸짓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으로서의 인공생명과 상호작용적 예술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어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샤머니즘적 의미론과 ‘벌레구멍’의 은유에 대하여 말해달라.

고대의 무당은 일종의 의식의 벌레구멍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의 장벽을 마음대로 넘어다닐 수 있었다. 이 은유는 고대 샤머니즘 전통에서의 예술의 기원을 오늘날 인터넷에 있어서의 예술 내지 미래의 시공 항해에서의 예술과 연결지을 것이다. 텔레마틱한 링크 내지 인터넷과 같은 하이퍼 미디어에 있어서 현대의 우리들은 벌레구멍을 통하여 갖가지 사이트나 노드(node, 매듭·파절·중심점)로 간편하게 드나들 수 있고, 이미지나 텍스트·장소나 사람들 사이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벌레구멍이란, 양자(量子)의 껍질(막)을 관통하는 터널이며, 공간의 토폴로지에 있어 아득히 떨어진 우주공간의 두 장소를 이어주고, 또 다른 조작을 하면 하나의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혹은 현실의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사람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양자의 껍질을 관통하는 터널’이란 이론적인 가설일 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웹(web)에 있어서 내가 데이터의 껍질이라고 부르고 있는 터널을 통하여 하이퍼 링크된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하나의 텔레프레젠스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 나아가서는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이동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벌레구멍과 같은 터널을 통한 이동은 거시적인 우주와 미시적인 의식이라는 두 개의 레벨에 있어 ‘몸짓’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는 은유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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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애스콧 <미디어 아트 작가·영국 웨일즈대 교수>


21세기 미술을 예견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아닌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의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디지털화되어 가는 미술의 비물질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 로이 애스콧은 이는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21세기 디지털 세상은 인공 생명체나 연결 의식, 또한 ‘모이스트 미디어’로 불리는 생물학적 텔레마틱 개념이 도입되면서 다시금 물질화의 경향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우선 예술이 ‘가장자리’에 처해 있다는 제목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 싶다. 이 말은 예술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인터넷의 앞머리와 텔레마틱 시스템의 뒷부분이 만나는 두 영역간의 만남과 겹침, 그리고 전이를 강조하기 위한 긍정적 의미를 띠고 있다. 즉,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소통과 전달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예술의 구조적 변화를 넘어서서, 그 컨텐츠의 성격과 내용까지 변하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상호작용 예술(Interactive Art)의 가장 두드러진 다섯 가지 특징을 말해본다면, 그것은 접속성·몰입·상호작용·변형·발생이다. 여기서 ‘접속성’은 개인, 혹은 시스템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인터넷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몰입’은 사용자가 멀리서도 몰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가상현실에서는 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사용자의 몰입에 반작용이 있는 것이 ‘상호작용’이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예술에서는 이미지와 시스템·구조·환경이 모두 변하는데, 그중에서도 사용자의 의식 ‘변형’이 가장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발생’은 사용자들이 시스템을 통해 볼 수 있는 시각적 발생물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 패턴과 환경의 도래와 함께 요구되는 신조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테크노에틱스 (technoetics)’는 어원상 기술과 정신의 희랍어에 각각 해당하는 ‘noetic’과 ‘nous’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런 정신(con - scicousness)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된 예는 단순히 근대적 관점에서 찾기보다는, 고대 의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테크노에틱스의 관점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물질과 기술적 측면으로만 기우는 위험을 피하고 인간 정신의 총체적 표현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적 자세에는 새로운 성격의 미디어의 도래가 필연적인데, 나는 이 새로운 미디어의 특징을 지적하여 ‘모이스트 미디어(Moist Media)’ 라고 부른 바 있다. 이 미디어는 디지털예술에서 볼 수 있는 ‘유선의(wired)’, 그리고 ‘건조한(dry)’ 세상과 생물학적 (bio-technology)이고 유기체적인 ‘젖은(wet)’ 세상이 합쳐지면서 탄생한 개념이다. 즉, 지난 20년간 예술이 줄곧 루시 리파드가 말한 ‘비물질화’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면, 향후 10년간의 예술은 재물질화(rematerialization)로 전개될 것이다.

이 모이스트 미디어는 여러 형태나 의미·경험이 텔레마틱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은 분자 구조 형태로 존재하게 해줄 것이며, 이런 현상을 본인은 ‘생물학적 텔레마틱스의 출현 (Bio-telematics Emergence)’ 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모이스트 미디어는 디지털 시스템의 정보 단위인 비트와 생명체의 원자·신경·유전자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모이스트 미디어의 출현과 새로운 예술이 도래한 결과, 필연적으로 예술과 건축과 같은 분야간의 경계가 없어지고, 각 분야의 원칙들은 모두 통합될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학습의 패턴이 요구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주의 에드워드 쿼크의 작업은 살아 있는 조직체의 생성 구조를 가지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이루어지는 작업인데, 그의 작품은 수소 원자 구조를 소위 벅키 볼(Bucky Ball)이라고 불리는 인공 피스톤 형태 속에 넣어 재구성하여 수소 원자 구조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10∼15년 내에 나노테크놀러지의 발전에 의해 예상되는 예술의 한 예라고 할 것이며, 물질 구조를 극소 단위까지 접근하여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제부터는 미디어의 변형에 따라 계속 부상될 것이 예상되는 몇 가지 개념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25년 전에 가상 현실이나 기타 디지털 기술이 실현되기 전에 텔레프레센스를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양자 컴퓨테이션과 양자 텔레포테이션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양자 텔레포테이션이란, 한 개체의 양자가 다른 개체로 전자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하며, 1997년 로마·인스브룩·칼 테크의 실험실에서 처음 실현되었다.

사이버와 현실의 공간접촉

내가 일하고 있는 리서치 센터인 CAiiA-STAR 는 질 스코트(Jill Scott), 피터 앤더스(Peter Anders), 돈나 콕스(Donna Cox), 나오꼬 토사(Naoko Tosa) 등을 배출했다. 이들은 현재 상호작용 예술·건축·무용·공연 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UCLA의 디자인과 학장으로 일하고 있는 빅토리아 베스나는 공간 중에 기제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것을 ‘정보를 담은 인간(Information Personae)’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네트상에서 벌어지는 정보 활동에 의해 구조가 결정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베스나는 이러한 인간의 예로 벅스민스터 풀러를 지적하여 그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풀러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공상의 아이디어를 공학과 건축으로 실현시킨 계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21세기를 앞둔 시점에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그려보는 데 풀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풀러의 이론과 업적은 디지털 문화에서 자료와 정보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ATR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소머러와 미뇨노의 작품 <발브(A Volve)>는 90년대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부각되었다. 이 작품의 관객, 즉 사용자가 모니터 위에 그림을 그리면 시스템이 그 모양의 살아 있는 생물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들은 물 안에서 움직이면서 사용자의 손동작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서 각자 독립적인 생명체로서의 생명 주기를 그리면서 서로 잡아먹거나 교미하며 죽기도 한다.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에서 생명체에 대한 개념도 많은 진척을 보았는데 이 글 그 내용을 깊이 소개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생명체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그 미세 단위인 살아있는 작은 형태의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여 생명체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 하는 문제들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생명체와 인공생명체에 대한 여러 발견에서 예술가와 건축가·디자이너 등에게 시사되는 점은 예전의 ‘위부터 아래로’ 진행하는 디자인의 패러다임이 이제는 ‘아래로부터 위로’ 변하고 있다는 방향의 변화다. 이 변화는 예술가들에게 디자인의 진화 과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대신, 형태가 자연스레 진화될 수 있도록 씨를 뿌리는 사람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드와르 켁의 작품은 종(種)간의 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 서부에 있는 나무와 미국 동부에 있는 새를 텔레마틱 시스템으로 연결하여 새의 노래와 식물의 성장이 일정한 기호 데이터로 전달, 해석되어 상호 성장과 감정을 교환하게 하였다. 혹은 박테리아로 한 작업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해 박테리아 조직이나 세포의 정보를 바꾸기도 하였다.

척 데이비스는 특별히 고안된 접속 매체를 사용하여 인체의 내면 구조나 메커니즘에 따라 개인이 가상공간에 몰입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관객이 마구처럼 생긴 장비를 머리에 쓰면, 그의 호흡에 맞춰 가상공간 중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다. 가령, 숨을 들이쉬면 시야에 보이는 가상공간에 본인이 뜨는 장면을 보게 되고, 숨을 내쉬면 몸이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경우는 관객이 몰입과 상호작용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이루어지는 등 밀접하고 친근한 장점이 있다. 텍사스 대학에서 트랜스건축(Trans-architecture), 혹은 액상건축(Liquid Architecture)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개척·탐구하고 있는 마르코스 노벡의 목적은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진 형태로 사이버 공간과 현실공간 사이의 접촉이 가능한 새로운 종류의 건축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상 공간을 위한 의식전환이 중요

다음은 본인이 브라질 비엔날레에서 최근 출품한 웹 작품인 <예술의 ID/사이버 ID>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모니터에는 참여한 예술가들을 의미하는 정사각형 로고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모호하고 주관적인 작가들의 정체성을 같은 준거 기준으로 측정하여 한자리에서 비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을 위해 먼저 나는 초대된 작가들에게 84개의 주요 단어 목록을 보여주고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9개의 단어들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 선택된 단어들로 그에 연결된 이미지 데이터들이 뜨게 되면 각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말해주는 9개의 이미지, 음향 데이터 조합을 받게 된다. 그 이미지들을 누르면 다른 종류의 음향과 이미지들이 몇 단계에 걸쳐 열리며 사이버 공간상에서 정체성을 풀어 설명해주는 것이다.

텔레마틱 연결망은 본질적으로 개개인 정신간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우리가 텔레마틱 연결망(mind on line의 상태)상에 의식을 분산시키면 인간 두뇌의 주성분이 지닌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최근 MIT Media Lab에서도 실험한 바 있는 공간 제한을 넘어선 컴퓨팅 개념 (Ubiquitous Computing) 과도 같은 상황으로서, 여러 시스템과 장비들을 이용해 상품·환경 등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 인간의 의식이 고루 분산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배경하에서 예술가들은 생물학적 텔레마틱스라는 매트릭스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환경에서는 본인이 ‘hypercortex’ 즉, ‘하이퍼 대뇌피질’이라고 명한 분산된 의식 상태가 요구된다. 이 의식은 그것을 담는 적절한 ‘하이퍼 신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 또한 인간의 의식을 재고하여 새로운 분산된 의식 상태를 이끌어낸 것에 비견되는 신체에 대한 재고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재고와 발견이 가능한 미래의 예술은 전통적 영역만을 고집하는 순수예술에 비했을 때, 아마도 더욱더 ‘미묘한 예술’로 보이게 될 것이다. 예술로서 미묘하다고밖에 불릴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생물학, 예술, 인간의 의식 연구, 인공생명, 공학, 신비주의, 컴퓨터 과학 등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상이한 분야들이 미세한 고리로 모두 연결되어있는 종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분산된 의식을 갖는 예술가들이 연결망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여 이들은 자연히 본인이 칭한 바 ‘telenoia’라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방되고, 포용적이며 협조적이고 건설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온 지구상의 개개인들이 의식을 분산시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환영하는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이 사고방식은 19세기적 산업시대의 편집증적 성격(paranoia)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도출된 것이다.

또한,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술가들이 개념(conception)을 잡는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될텐데, 본인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의 개념을 사이버 개념(cyberception)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기술은 단순히 어떤 문제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지방법, 즉 생각하는 방식이나 시스템 차원의 변화를 야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인지방법을 총체적으로 사이버개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소 해부학이나 존재론적인 영역도 포괄하면서 신종 사이버 인간의 주요한 새 신체 기능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제 예전의 자연 대신 새로운 제2의 자연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삶의 발전을 자연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기엔 충분하지도 않고 또 그 속도가 너무 느리며,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진화 과정에 적극 개입하며 주어진 유전자 환경 이외의 변수들을 반영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찍이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가 내린 현실(reality)에 대한 분석은 예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현실은 더 이상 주어진 완성체가 아니라 보는 이가 이해하기 쉽게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은유(metaphor)들로 가득 차 있는 기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당 기존의 언어나 제도 같은 은유들에 의혹을 갖고 적극 개입해 점검함으로써 자신만의 은유들로 현실을 다시 표현해내는 것만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인 브라질 철학자 로베르트 망가베이라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가 예술가의 중요 역할을 변형적 저항(Transformative Resis - tance)으로 정의한 것은 로티의 현실 의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임이 분명하다. 예술가의 변형적 저항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미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부연하자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지적·창의적 개척 활동에서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다루게 되는 공간은 르네상스부터 지난 20세기까지 줄곧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던 유클리드적 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이다. 유클리드적인 공간이 시점이나 원근법 등 우리의 몸을 단위로 측정해온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몸과 분할, 확실성과 같은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면, 사이버 공간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신·불확실성·연결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 예술가나 철학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무엇으로, 해석자의 은유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 현실의식은 텔레마틱 시스템이 생물체처럼 발생· 증식· 성장해 가는 변화 진행중에 있다는 점, 즉 텔레마틱 시스템이 생물학적 재물질화 추세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시스템이 응용된 모든 분야는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방식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의식 전환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미디어로 설계한 건축은 보는 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고하고 느끼며, 보는 이의 반응을 반영한 후 자신의 반응도 되돌려줄 수 있는 건축이 될 것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이 들어선 도시 자체는 새로운 형태의 의식과 후기 생물학적 개념이 도입된 사회 구조를 표현해주는 하나의 거대한 매트릭스가 될 것이다.

심령세계와 사이버 공간의 텔레마틱 미디어

텔레마틱 미디어는 기존의 과학과 달리 ‘이중의식(Double Con - sciousness)’이라는 정신상태를 허락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데, 서로 차원이 다른 두 장소에 의식이 동시 분산 병행될 수 있는 상태다. 간단히 예를 들면 의사가 수술을 할 때, 특수 장치를 부착한 한쪽 눈으로는 환자의 몸 안쪽을 살피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의 육안으로는 몸의 표면을 보면서 수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즉, 텔레마틱 미디어는 과학에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심령 세계와 사이버 세상의 교접을 가능케 해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중의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진정한 상호작용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작품과 관객, 관객과 사이버 공간 혹은 관객과 가상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 이중의식의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부지런히 손과 발만을 이용해 단순 조작하는 상호작용은 다른 제3의 관객에게는 한낱 스펙터클로만 그치게 되는 수가 많다.

대부분의 미술관 전시에서 상호작용 예술작품이 단순한 스펙터클 쇼로 전락하고 마는 이유는 관객이 작품 앞에 얼마나 모이건 상관없이 개개인의 내면까지 깊게 닿을 수 있는 진정한 차원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러한 상호작용은 오히려 미국 원주민들이 초혼의식 중에 빠지는 몽환적 상태에 더 가까운 일종의 ‘연기(enactment)’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기는 퍼포먼스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생물학적 미디어 즉, 모이스트 미디어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의식과 예술 전반에 걸친 가치 변동을 위의 표 형식을 빌어 요약하고자 한다.

 

 

번역 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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