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프랙탈 이야기들

작가와 함께한 프랙탈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2009.10.31 00:04

프랙탈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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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프랙탈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중심으로 프랙탈아트 작품을 소개했다면 이번 글에는 좀더 프랙탈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프랙탈이 수학적인 요소에서 출발하였으나, 최근 화려한 색과 현란한 모양으로 뭇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랙탈을 이야기 하다 보면 자주 테셀레이션과 비교 질문을 받곤 한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유리창문의 창살 및 욕실이나 마루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과 같이 틈이나 교차점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도형으로 덮는 형태(모양)를 말한다. 대표적인 테셀레이션 작가로는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이다. 에셔는 수학적 소재라 할 수 있는 테셀레이션을 예술적 경지로 발전시켰다. 아래의 테셀레이션 그림이나(좌) 혹은 에셔의 작품을 무한대로 확대(Zoom In) 하다 보면 원래의 이미지나 도형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자기 유사성을 가진 프랙탈(아래 작품 오른쪽)과는 다른 것이다. 프랙탈은 아래 프랙탈작품(우)에서 보듯이 무한히 확대해도 작은 소용돌이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이미지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2-1.jpg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현상들을 보곤 한다.
주위에서 느끼는 이런 현상들 중에서 불규칙 적이고 무질서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 해안선, 구름, 산, 태풍, 돌개바람, 담배연기 등등 이런 것들은 자연현상 속에서 무질서한 현상 및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혼돈과 무질서는 인간의 지식으로 정의를 내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70년대부터 활발해진 이런 혼돈에 관한 연구가 Chaos 및 Fractal등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일까? IBM의 토머스 왓슨(Thomas J. Watson)연구센터의 만델브로트(BenoitMandelbrot)는 프랙탈 이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으며, Fractal(프랙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처음 그의 논문이 네이쳐지에 실렸을 때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다 한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프랙탈이 뜨거운 감자가 되자 그때서야 과학자들이 부랴부랴 만델브로트의 논문을 뒤지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논문(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에서 심오한 의문을 제기한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될까?" 라는 것인데 이 넌센스 같은 질문은 그 후 많은 논문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반지름 1인 원의 원주의 길이를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원주 공식(2Πr)을 적용하면 된다.
Π(파이) = 3.14159.... 이므로 2Πr는 대략 6.28이 된다.
영국의 해안선을 알기 위해서 같은 방법으로 아래의 그림과 같이 적용 할 수 있다.

 

1.gif

 

즉, 곡선의 길이를 잘게 쪼갠 직선의 길이의 합으로 가정하여 계산하는 방법은 측량기사가 지형도를 만들 때 사용하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절차다. 아래의 표를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won.gif 

 

 

선을 많이 쪼갤수록 2Πr(6.28)에 가까워 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델브로트가 제시안 영국의 해안선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자.
프랙탈의 창시자는 IBM의 토머스 왓슨(Thomas J. Watson)연구센터의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이다. 그는 Fractal(프랙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논문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에서 프랙탈 인식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내놓았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은 언뜻 보기에는 넌센스 같지만, 이 단순한 질문은 실로 심오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면 만델브로트가 제시한 영국의 해안선은 얼마나 될까?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해안선을 200마일 단위와 25마일 단위로 잰 것이다. 25마일 단위로 재면 200마일로 단위로 잰 것에 비해서 측정된 해안선의 길이가 길어진다. 그 이유는 해안선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복잡하기 때문이다. 만일 더 작은 단위로 해안선을 재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1cm단위로 잰다면 어떨까? 아니, 원자 한 개 길이만한 자로 잰다면 어떨까?
2-2.jpg 
만일 1cm 길이의 측정단위를 사용하여 전 해안선을 기다시피 하며 세밀하게 측정 할 경우, 모든 해안가의 짧은 곡선, 해안 바위들의 굴곡 하나하나가 합산 되어 해안선 측정 값은 엄청나게 증가되어 천문학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3.gif

 

측정단위에 의해 합산된 곡선의 길이가 단위를 작게 할수록 무작위로 커진다면 그 곡선은 프랙탈 곡선이라고 한다. 따라서 영국의 해안선은 프랙탈이다. 이유는 영국의 해안선은 크고 작은 수많은 만, 내해, 작은 강, 복잡한 바위투성이들로 구성되어 매우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더욱 짧은 측정단위를 사용하면 구부러진 지형들에 깔끔하게 맞출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전체 길이는 증가하게 될 것이다. 원 모양의 곡선과 영국의 해안선과 같은 곡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은 곧 고전적인 기하 형태와 프랙탈 기하 형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에 첫째 명제가 제기된다. 영국의 해안선은 프랙털이다. 그래서 그 길이를 측정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프랙탈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것이다.

      4-1.gif

  

영국의 해안선이 프랙탈이라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주위의 다른 곳에서도 프랙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구름, 산, 나무, 심지어 사람의 뇌의 주름 등에도 프랙탈을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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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23:30

프랙탈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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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프랙탈을 접하게 것은 1992~3년인듯 싶다. 프랙탈은 처음 수학에서 출발했지만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환성적인 색과 화려한 모양의 프랙탈 작품이 먼저였다.

프랙탈이란? 물체를 아무리 크게 확대를 하거나 또는 무한대로 축소하여 현미경으로 들여다 정도로 세분한다 할지라도 본래 물체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프랙탈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양치류이다. 양치류의 잎들은 각각 전체의 축소형이다. , 가까이에서 보는 형태가 멀리서 보이는 형태와 같다. 이는 프랙탈 프랙탈의 특성인 자기유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먹는 브로컬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아래 왼쪽  사진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을 있는 양치류이다. 아래 사진과 같이 멀리서 보이는 전체의 이미지, 삼각형 형태가 잎에서도 원래 모양과 유사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음을 발견 있다 

1-1.jpg

번개.jpg

번개의 전파는 습도, 기온 및 기타 그 지역의 다양한 환경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번개의 경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옆의 사진을 통해 쉽게 번개 치는 보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경로는 직선이 아니고 꾸불꾸불 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번개의 모습은 비 규칙적으로 진행하지만 자기와 유사한 가지치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모습은 불규칙하지만 전체모양은 가지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나무.jpg또, 멀리서 바라보는 나무 모습은 옆 그림과 같이 나무 기둥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좀더 가까이 나무를 들여다보면 그 가지는 다시 더 작은 가지로 뻗어가고 그 가지는 다시 더 작은 가지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유사성을 통한 전형적인 프랙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듯 프랙탈은 끝없는 반복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세분화된 모양이 원래의 형태와 동일한 모양의 자기유사성을 갖게 됨을 말한다. 최근 이런 이론을 통하여 프랙탈이 “프랙탈 아트”라는 예술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이런 프랙탈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사람을 프랙탈 아티스트라고 한다.
필자가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이번 작품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을 소재로 한 프랙탈 작품들이다.

 

 

 

 

줄리아집합.jpg

옆의 푸른색 그림은 줄리아 집합(Julia set)이라고 하는 유명한 프랙탈이다.
이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반복되는 소용돌이 형상 내부에 다른 소용돌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그림을 가까이서 들여다 본다면 프린터가 인쇄할 수 있는 한계까지 더욱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무한히 반복되는 형상을 유한한 공간상에 축소해 놓은 것일 뿐 전부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정의를 하자면, 프랙탈은 스스로를 계속 축소 복제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반복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세분화된 모양은 원래의 형태와 동일한 자기 유사성을 갖는다. 

 

 

 

 

 

-계속- 

 

  

 

-참고-

 

프랙탈이란

프랑스의 수학자인 만델브로트Mandelbrot는 1967년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선의 총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넌센스같은 질문은 매우 심오하고 오묘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글에서 만델브로트는 영국의 해안선의 길이는 어떤 자로 재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Cm 단위의 자로 재었을때와 1m 단위의 자로 재었을때는 둘래의 길이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된다.

70년대 중반 프랙탈이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여러 과학자들이 만델브로트의 논문을 실렸던 '사이언스'지를 뒤적거리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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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00:24

프랙탈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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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 나타나는 프랙탈들..

앞에서 만델브로트가 제시안 영국의 해안선이 프랙탈이라면 우리 주위의 다른곳에서도 프랙탈을 찾을 수 있까? 해답은 자명하다.. 프랙탈은 우리 주의의 모든곳에서 찾을 수있다. 앞에서 정의-1 과 같이 곡선의 길이가 단위를 작게 할수록 무작위로 커진다면 그것은 프랙탈이라고 정의했다.(프랙탈 이야기-2 참조)

 

필자가 앞 글에서 언급했지만 프랙탈 특징을 이야기 하다 보면 항상 자기유사성(Self-similar)에 관하여 논하게 된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자기 유사한 물체는 프랙탈이라고 하지만, 모든 프랙탈에 자기유사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프랙탈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불규칙성에 의해 정의되지만, 이러한 불규칙성이 꼭 동일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5-1.gif

5.jpg 

위의 사진 왼쪽은 달 표면에 남긴 발자국이라는 유명한 사진이다.
발자국 주변은 자갈이나 돌들로 인해 울퉁불퉁하고 불규칙적으로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달에서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인데, 아마 많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사진 또한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나타나는 유명한 사진중의 하나다. 자 그럼 두 사진을 보자. 지구를 바라보는 사진 속 달의 모습과 발자국이 찍힌 달 표면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위의 왼쪽사진에서 발자국만 없다면 달의 표면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달도 프랙탈이다.

우리는 이전 글에서 프랙탈의 작은 부분이 전체와 유사한 것을 프랙탈의 자기유사성이라 했다. 그러나, 달표면을 비교한 두 장의 사진에서 관찰했듯이 모두 프랙탈의 불규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프랙탈 차원은 멀리서 본 달 표면보다 가까이서 본 발자국 사진에서 더 높게 보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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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00:29

프랙탈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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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주위에서 프랙탈을 찾자보자..

 

[산]

산도 프랙탈이다.

멀리 보이는 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들을 보노라면.. 모두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험준한산이거나 아님은 그렇지 않거나 하는 정도지.. 모양은 다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바로 산도 프랙탈이다.

 

정상에 올라서서 바로 앞에 보이는 언덕까지 2~3시간정도면 갈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가보면 험준한 개곡과 협곡들을 지나다보면 하루종일 걸릴수도 있다. 길은 곧아지고 기차나 비행기 항로등은 더욱 짧은 거리를 질주하고.. 옛날과 같이 굽이굽이 자연의 프랙탈을 밟아가던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현대인들은 더욱 멀리 벗어나고 있는 지금... 산을 오르는 재미는 프랙탈 차원의 면들을 밟아가므로서 부분적으로나마 태초의 혼돈과 자연이 주는 프랙탈을 본능으로 인지하여, 자연으로부터 온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재미가 아닌가? 한가지 생각해야될것이다. 프랙탈의 특징을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자기유사성(Self-similar)에 관하여 논한다. 본인도 앞의 프랙탈이야기-1에서 언급했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유사한 물체는 프랙탈이라고 하지만, 모든 프랙탈이 자기유사하지는 않음을 알아야한다. 프랙탈은 모든 범위에 존재하는 불규칙성에 의해 정의되지만, 이러한 불규칙성이 꼭 동일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구름]

구름도 산과같이 프랙털의 신비한 예가 될 수 있다.
비행기안 창측에 앉아서 구름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는 프랙탈을 연구하는 일 일것이다. 어떻게 구름도 프랙탈이 될 수 있을까? 구름도 앞에서 언급한 산과 같이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프랙탈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호수의 표면]

호수의 대부분의 표면은 잔잔하다.
바람부는 날에는 잔잔한 부분이 작아지고 고요한 날엔 커진다. 최근까지 호수면에 일어난 잔잔한 파문은 일정한 형태로 퍼져나가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유체의 복잡한 운동의 하나인 와류(Turbulence)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바람부는 날 물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해 봄으로써 파문의 형태가 균일한 것이 아님을 찾아 낼 수 있다. 호수의 표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볼때 매끈한 면과 거친 면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지극히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잔잔함과 거침이 혼합되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프랙탈임을 알 수 있다.

 

[날씨]
만일 나이아가라 폭포위에서 하나의 작은 나무잎을 폭포에 띄운다면 몇 분 후 폭포 아래로 떨어진 잎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물음에 아무리 고도의 과학으로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예측을 한다손 치더라도 정확한 답을 예측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날씨가 바로 그렇다. 강력하고 복잡한 슈퍼컴퓨터로 일기예보을 예측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이것은 컴퓨터의 오작동도 아니고, 수학적 알고리즘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날씨에 관계하는 역학적인 구도가 혼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앞에서 언급한 폭포 밑으로 떨어진 작은 나뭇잎의 위치를 예즉하는 것과도 같다. 날씨는 동역학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출렁거리는 호수 위의 고요한 파문은 지구뒷편으로 전달하여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일이다. 즉 카오스 이론의 모태가된 유명한 나비효과(베이징에서 나비 한마리가 날개를 퍼덕임으로써 뉴욕에 폭풍우가 몰아칠 수 있다) 이다.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일기예보를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전선을 동반하고 동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거대한 저기압대들이나 걸프만의 허리케인은 항시 존재한다. 일기에 관한 위성사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들 중 하나다. 이 위성사진들은 혼돈(Chaos) 일기 역학의 그래픽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프랙탈에 이르는 또다른 경로 혼돈에 관하여 논하게 됬다.

정의 :
동역학계(Dynamic System)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의 집합이다. 계통 내부의 초기 조건상의 변화가 후에 계통상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동역하계는 혼돈이라 한다.

프랙탈의 특징들
       - 분리된 차원(Fractional Dimension)

       - 모든 영역에서의 복잡한 구조(Complex Structure at all Scales)

       - 무한정한 가지치기(Infinite Branching) - 자기유사성(Self-Similarity)

       - 혼돈 역학(Chaotic Dynamics)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모든 프랙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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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1914∼18년)때부터 전후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 음악 및 문학상의 운동으로 반미학적 · 반도덕적인 태도를 특색으로 하는데, 운동이 전개된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성격이 반드시 한결같지는 않다.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전쟁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여, 이곳에 전쟁을 싫어하여 모인 젊은 예술가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아 부정과 파괴 정신을 호소한 예술운동이다.

 

사전에서 우연히 눈에 띈 단어 <다다>(불-독어로 어린아이들의 회전목마)를 운동의 명칭으로 삼았으며, 다다는 전위미술전을 개최하거나 잡지를 발행,  우연을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시가 발표되는 등 여러지역에서 전개되었으며, 1922년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소집된 파리의 회합에서 종결에 이른다.


취리히 다다

1. 취리히의 다다운동의 탄생

제 1차 대전시 스위스는 지리적으로 맨 중앙에 있었으나 중립을 지켰으며, 정신적인 자유가 만연하였다. 

전쟁을 피해 모인 매우 다양한 개성의 소유자들(루마니아 출신의 시인 트리스탄 짜라/독일의 소설가, 철학자 겸 연출가 휴고 발/작가이자 의사인 리하르트 휠젠백/화가이자 조각가이며 시인인 장(한스) 아르프/루마니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르셀 장코 등)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어 최초의 반예술 운동을 전개하는데,  그 중심이 스위스 취리히의 <볼테르 카바레>이다.

 

이들의 예술은 기계의 요란한 소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연상시의 낭독, 광적인 무대 혹은 카바레 공연, 무의미한 설교, 이성이 통제없이 우연이나 직관으로써 제작된 회화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통한 다다이스트들의 의도는 전역사를 통하여 예술창조를 이끌어 왔던 전통, 규칙, 논리적 근거, 심지어 질서, 조화, 미개념들까지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기 위함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이성과 논리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일으켰으며 유일한 구원의 길은 본연의 감정, 직관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볼테르 카바레>

1916년 2월 1일 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휴고 발에 의해 개업된 전시장과 무대를 가진 예술적 분위기의 카바레. 여기를 근거지로 일체의 전통적 가치나 인습적 형식과 이성에 도전하여 이를 우롱하고 부정하는 데모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관객의 사이사이에서 시낭송,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카바레에 그림도 전시한다. 즉, 볼테르 카바레는 무엇보다도 문학적인 발표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시, 이야기, 노래를 만들고 공연하며 발간하는 일의 예술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시각예술에서 실질적인 혁신은 장 아르프가 우연에 의해 배열했던 자유로운 형태의 부조와 콜라주 뿐이었다.

 

dada1.jpg 

장 아르프<우연의 법칙에 따른 사각형의 콜라주>1916~17 

 

2. 취리히 다다운동의 특징

비계획적인 프로그램-------관객의 참여예술/해프닝의 예고

모든 계획적인 프로그램에 반대하였고, 다다가 모든 방향으로 만발하도록 하며 사회적, 미학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도록 하는 폭발적인 힘을 당시의 다다운동에 부여한 것은 바로 무계획적 속성이다.

시인 짜라의 경우, 시를 불어로 낭송하고, 노래 부르고 지껄이고, 때로는 외침, 흐느낌, 휘파람 등을 섞어가면서 자신의 연기가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나 북을 울림으로서 내는 소리는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는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이러한 소음음악은 미래주의에서 도입되었다.

휠젠백은 그가 작곡한 몽상하는 기도의 곡조에 따라 박자를 맞추어 가면서 말채찍을 휘두르고 은유적으로 관객들의 엉덩이를 치는 시늉을 함으로서 관객들의 신경이 곤두서게 한다.

우연에 의거한 제작태도----이성과 합리에 대한 회의, 부정, 파괴, 즉 반 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제작태도를 견지한다.

한스 아르프는 뎃생 작업을 찢어 바닥에 흩어지게 함으로써 작업을 끝내고, 흩어진 종이 조각들 사이에서 표현적인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실험작업이 다다를 이전의 다른 예술운동과 구별시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
짜라는 우연의 원리를 사용하는데, 짜라는 신문기사를 한 단어의 길이 이상으로 되지 않게 끔 가느다란 쪼가리들로 절단하여 그것들을 종이 상자에 넣고 뒤흔들어 흩어지게 한다. 떨어진 낱말들이 다시 조합되어 한 편의 시가 되게 만든다. 앙드레 마송은 모래 한웅큼을 양손에 모아 움켜 쥐고서는 준비된 캔버스 위를 무용수처럼 움직인다. 우연에 의한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처럼 뜻 밖의 연상 낱말의 예기치 못한 조합의
우연은 다다로 인하여 예술 영역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뉴욕다다(1915~1920년)

제 1차 세계대전 중 뉴욕다다는 마르셀 뒤샹과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뉴욕에 와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전위적 화랑에서 동지적 분위기를 발견하는 우연적 만남에 의해 비롯되었다.

뉴욕에서는 카바레 대신 사진예찬론자 스티글리츠의 조그마한 사진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스티글리츠는 ‘인간의 감성과 표현이 사진판과 인화지를 통해서는 획득될 수 없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사진이 실제 세계의 복제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새로운 세계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을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뉴욕 5번가 291번지에 ‘사진 분리파의 작은 화랑’(후에 291이라고 개칭됨)을 세우고 ‘카메라 워크’라는 잡지를 발간한다.


1915년에 스티글리츠는 뒤샹과 피카비아의 도움을 받아 이 작가들의 반 예술사상을 발표하는 정기 간행물 291을 창간한다. 이것은 취리히 다다만큼이나 응집력 있는 그룹이 발효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  이중에서 뉴욕다다를 일으켰던 가장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는 마르셀 뒤샹이며, 프란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와 모턴 샴버그 등이 있다.


마르셀 뒤샹(1887~1968)

190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인상파, 후기인상파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입체주의 그룹에 참여하여 차츰 큐비즘을 배우게 되나 연속사진에 자극을 받아 본질적으로는 정적인 큐비즘의 표현과는 다른 운동과정에 관심을 돌리며, 1912년 스스로 고안한 기계적 회화로 전향했다. 작품, 날랜 누드가 가로질러간 왕과 왕비(1912) 여기에서 나타난 인물들은 기계화되어 있고 작동중인 기계인 것이다.  그런 후 1913년부터는 그리는 행위를 포기하여 20세기 조각의 주요혁신인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조각과 평범한 사물을 제시하거나 그런 것을 포함하는 오브제를 제작한다. 이것은 후에  키네틱 조각, 폐품조각, 팝아트로 발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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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날랜 누드가 가로질러간 왕과 왕비>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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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회전판> 1920년

 

 

프란시스 피카비아

파리에서 자라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908년에서 1911년 사이에 인상주의에서 큐비즘으로 전향했으며, 미래주의를 시도했다. 1915년 뉴욕에서 마르셀 뒤샹과 함께 미국판 다다이즘을 일으켰으며, 뒤샹의 정신을 좇아 기계 이미지를 상징적 표현 방식으로 삼았다. 이러한 양식으로 그의 동료들의 기계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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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피카비아 <이것이 바로 스티글리츠다> 1915년 

 

 

1916년 유럽으로 돌아온 피카비아는 바르셀로나에서 391을 간행하고, 1918년 파리다다 그룹에서 활동한다.


만 레이 (1890~1977)

다다오브제를 고안하는 능력에서 뒤지지 않았다. 타고나 환상주의자였던 만 레이는 스티글리츠와 사귀면서 사진을 제작했으며, 자신이 <레이오 그래프>라 칭한 사진 영상을 발명했다. 이것은 카메라 없이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물건들을 감광지 위에 가까이에 놓고 직접 광선에 노출시켜 만드는 것이다. 이 기법은 다다식으로 순전히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작가는 노출을 조절하고 대상을 움직이거나 제거함으로서 기묘하게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성격을 갖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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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 <레이오 그래프> 1922년

 

 

독일 다다:1918~1923

이 시기 독일은 전쟁이 모든 것을 고갈시키면서 끝날 줄 몰랐고, 통제는 극심했으며 미래는 불확실한 환멸과 비판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독일 다다가 탄생한다. 1917년 휠젠벡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뷔랜트, 라울 하우스만, 게오르게 그로츠 등과 함께 작은 그룹을 만든다. 여기서 표현주의, 큐비즘, 미래주의 등을 포함한 예술 현상의 모든 국면을 공격하는 연설과 선언으로써 다다운동을 시작한다. 많은 시인이나 미술가를 배출하기보다 취리히 다다가 실험했던 소음음악과 추상적 음성시 등이 깊이 탐구되었다.

시각예술중에 중요한 발명은 다다적 효과를 위한 사진몽타주였다. 그것은 사진의 단편들을 종이에 오려 붙여 새롭게 조합하여 다시 붙여 만든 것이다.

이 기법은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유래된 것이나 다다에서는 부조나 입체적 작품을 실현했다는 점이 큐비즘의 콜라주와 다르며, 다다이스트들과 이후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이상적 형식이 되었다.


독일 하노버의 미술가 쿠르트 슈비터스(1887~1948년)는 베를린 다다이스트들과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독일 다다를 빛낸 가장 순수한 대표자이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는데, 자작시를 낭송할 때 감명을 주는 재능 있는 시인이었으며, 회화, 콜라주, 구성에 대한 그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그의 콜라주는 길에서 주운 폐품(담배 포장지, 승차권, 신문지, 끈, 널빤지, 철망 등 무엇이든 그의 흥미를 끄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작품을 못질하여 만든다고 하였는데 그의 부조 구성 작품이나 특히 그가 슈비터스 기둥(메르츠 바우)이라고 부른 거대한 연작 구성물에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슈비터스에게 있어 가장 주목되는 작품이 바로 이《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 표현에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메르츠바우는 1920년대 내내 계속 온갖 종류의 물체를 부착하여 방안이 가득 채워질 만큼 커지게 되었고, 위로 올라가는 것 외에는 공간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천정을 부수고 2층까지 구성을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이후 기하학적 추상과 구성주의 작업으로 진행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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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슈비터스 <하노버 메르츠바우> 1925년


 

막스 에른스트(1891~1976)

1919년 퀼린으로 이사한 장 아르프는 젊은 독일 화가인 막스 에른스트와 함께 다른 다다 분파를 형성한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에른스트는 대상의 변형으로써 콜라주와 사진 몽타주를 제작하는데,  이것은 후에 초현실주의에서 중심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이질적인 물상의 그림을 대비시키고 의외성에 의한 환상과 욕구를 자극하여 프로이트가 말한 잠재의식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1년 파리로 이주, 1924년 이후로 초현실주의 회화의 중심적 존재가 된다.  1925년 무렵에는 프로타주 기법을 개척했는데, 이것은 판자의 나뭇결과 나뭇잎, 돌, 마대(麻袋) 등의 위에 종이를 놓고 종이 위를 목탄과 연필로 문질러서 상(像)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환상세계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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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른스트<여기 모든 것이 아직 떠 있다> 1920년   

 

파리다다 (1919~1922)

  전쟁말기에 이르러 다다 운동은 프랑스 수도에서 자라나게 되었는데 시각예술보다는 문학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문학가들의 수중에 있던 파리다다에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고 신경질적인 선언서, 발표회, 간행물, 이벤트, 해프닝 등이 이루어졌다.

 

1921년 아르프와 에른스트가 쾰른을 떠남으로서 쾰른 다다는 끝이 나게 되며, 이와 동시에 베를린 다다도 끝이 나게 되고, 뉴욕다다의 뒤샹과 만레이는 정기 간행물인 뉴욕다다의 단 한번의 발간을 끝으로 뉴욕다다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리고 다다의 창시자인 취리히 다다이스트들도 흩어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원래 형태의 다다운동은 끝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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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죽음에 대한 소고

  Karsten Harries

 

수의 신비(mysticism)는 지금까지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이 다가오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혹시 내가 세기가 넘어가는 그 순간에 잠들어 인류가 세 번째로 맞이하는 밀레니엄을 깨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지나 않을까였다. 인류 전체가 흥분하는 그 시간대에, 폭죽과 흥분이 나의 주위에서 역력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세기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만에 하나 잠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조금은 무책임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의 문화 전체를 바꾸거나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 진행과정에서, 연도를 쓰는 자리에 0이 세 개나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우리들이 진정으로 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또는 무작정 무언가에 이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앞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할 때다.

나는 작가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예술 역시 문화의 다른 측면들과 같이 그 형태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적일 정도의 힘찬 진행과정에 잡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가끔은 우리들에게, 과연 이 모든 프로세스가 끝났을 때 그 결과물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더 단토(Arthur Danto)는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의 종말(End of Art)’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또 자칭 예술이라고 하는 여러 부류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현재 세계의 미술시장이 호황을 거듭하며 번창하고 있을 때 예술의 종말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번창하고 있는 오늘날 미술세계의 지표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날 미술의 단면도들이 그 종말을 예고하거나, 벌써 죽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토는 현재 평론가로서 활동하며, 유동적인 미술시장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도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는 헤겔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겔 역시 미술의 종말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과 단토의 이론은 비교해볼 만하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헤겔의 세 가지 입장을 밝히고 있다.

 

a. 예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진리라는 이름하에 형상을 가진 가장 높은 형식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b. 혹자는 예술이 계속 발전하고 완벽한 형태를 취하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영혼이 애타게 찾는 것이 아닐 것이다.

 

c.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예술은 우리들에게 그 역할이 주는 의미에 한해서 과거의 것으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헤겔이 이 말을 한 것은 1820년대의 일이다. 그 이후에도 많은 컬렉터들을 만족시켜주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말이 근거 없는 이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볼 만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술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역할을 충족시켜주는 예술이 있다고 하다면 과연 그것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헤겔의 이론은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것이고 단토가 자신의 예술 종말론에 대해서 생각을 펼친 것은 20세기의 예술 전반을 관찰한 후였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이해 속에서 그 이론을 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현재 우리의 생각에 가장 큰 도전장을 내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전보다 더 생동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다.

 

예술시장은 다른 어떤 때보다 현대에 와서 번성하면서 거대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론과 이렇게 번창하는 예술시장의 거대한 사업들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캐묻는다면 현재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말할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술이 죽었다’는 것은 현재의 예술시장의 단면도를 보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지금 세기를 이끌고 나가고 있는 화랑들이 내보이는 예술 형태들은 우리에게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뒤에 버려둔채 전진하고 있는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한다. 단토는 현재 미술시장에 놓인 ‘거대한 먹구름’ 에 대해서 말을 한다. 이는 예술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 “과연 예술이 미래가 있을까” 와 같은 비관주의가 퍼져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시대의 폴록과 로드코, 그리고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가졌지만 현대 예술가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먼저 답을 해보면 칸딘스키와 피카소는 그들의 예술세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narrative)를 완성함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예술 형태로 인식하게 했다. 오늘날 이러한 이야기 방식의 예술은 대부분의 현대 예술가들에 의해서 예술의 진정한 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과 단토가 말하였던, 예술이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헤겔은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 작품성 자체보다도 그 작품이 전해줄 수 있는 진리의 형상을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비록 하나의 물질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가 구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지금과 같이 과학적인 이성이 사회 전반에 진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때에 예술 역시 또 하나의 진리의 형상이라는 말을 할 여력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 않다. 헤겔이 예술의 가장 높은 가치로 간주했던 ‘예술의 죽음’은 단토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죽었음을 알리는 전주곡(presupposition)이 되었다.

‘예술은 죽은 것’이라는 생각의 시초는, 예술가들이 철학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예술의 정수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것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단토는 여기에서 포스트 모던 예술의 개념을 처음 시작했던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오늘도 여러 형태의 작품들이 제작되면서 예술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으며 또한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들 내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캐묻고 있다. 현대 예술은 가끔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면서 ‘미’ 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며 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예술이 이제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학적인 오브제로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은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단토는 워홀이 제작했던 브릴로 박스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브릴로 박스는 추상회화를 추구했던 스티브 하비라는 작가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것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그 진짜 제품보다 올덴버그나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들과 더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단토가 지적하는 이 두 개, 즉 우리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브릴로 박스와 작품안에 있는 브릴로 박스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이것을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단토가 지적하였던, “왜 상점에 있는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워홀이 만든 브릴로 박스는 예술이라고 불리는가”에 대해 더 이상 예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사고가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들은 또한 헤겔과 같이 진정한 예술은 정신과 영혼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토의 이론과 맞지 않게 된다. 물질 속에서 정신은 느껴져야 한다. 위대한 예술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문점은, 어떻게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호소하여 하나의 정신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궁금증을 자극한데서 시작한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품들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예술을 이해하게 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관객들이 그 작품을 작가 아이디어의 한 도면으로만 인식하게 되어 그 예술작품은 언젠가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하의 작품 대부분은 이렇게 하나의 이슈가 아이디어가 되어서 기호화된 것이다. 성과 인종, 건강, 그리고 테크놀러지 등의 이슈들을 내걸고 세계를 자극하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은 그 의미가 가벼워졌다. 작품들은 생각의 이미지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예술이 이렇게 작가의 생각과 이론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장식적인 도구가 되었을 때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예술은 물질 안에서의 의미의 화신이 되어야 함을 가정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손실 없이 다른 표현방법에 의해 해석될 수 없는 의미다.

단토는 뒤샹과 워홀이 - 그리고 현대의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해시켜준다. 이렇게 예술을 ‘철학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곧 하나의 역사가 단락될 것을 말한다. 예술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하는 객관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이론을 예술이 아닌 다른 측면을 설명할 때 펼치기도 하였다. 즉, 영혼에 대해서다.

헤겔은 정신적인 세계는 그 발전과정에서 감각적인 것과 예술의 영역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 현대인들은, 이보다 진화가 덜 되었던 문명보다도 예술의 필요성을 더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헤겔이 예술의 종말론에 대해서 말을 했을 때에는, 이른바 발달하는 정신세계의 단면과 연관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예술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죽어 가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다만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은 현대의 예술을 심사숙고하면서도 과연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러한 예술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 단토의 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죽음 뒤에 승화된 새로운 예술형태, 즉 헤겔이 밝힌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에 대해서 가능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을 다시 이해한다. 즉 “진리가 그 형상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하이데거는 이렇게 예술이 참된 존재로 남겨지기를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사회 형태, 즉 이성적인 사고,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 역시 헤겔이 밝혔듯이 사람들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하며, 그 전환점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물질을 통한 정신적인 승화를 줄 때, 그 경험을 통하여 진리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겔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극단적인 이론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이성 쪽에 서 있었다. 즉, 헤겔은 예술이 죽음으로써 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결과물로 승화된 정신성이 재현될 것이며 인간이 발전하는 데 정신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단토 역시 이 이론을 따르고 있다. 단토는 현대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단토가 어둡고 신화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리처드 바그너의 전통을 따르고, 헤겔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면서 계몽적인 사고방식과 이성적 힘을 소유한 작가 안젤름 키퍼에 대해서 말하며 그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하이데거 : 키퍼 = 헤겔 : 워홀’ 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키퍼를 저버릴 준비가 안되어 있다.

 

나의 최근 저서 《건축의 윤리적인 기능에 대하여》에서 나는 물질이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책에서 나는 ‘물질의 리얼리즘’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즉, 건물들이 유리·콘크리트, 그리고 돌과 벽돌 및 나무들로 지어지지만 건물의 완성된 형태 속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새로 태어나며 그 물질들이 시각적으로 의미를 지원해 줄 때, 다양한 물질들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예술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결코 의미가 물질을 완전히 떠난 것이라는 이해는 피해야 한다.

이러한 예술 형태와 건축물은 물질 속에서 같이 공존하는 의미를 더 나타내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헤겔과 단토를 반박하며 하이데거의 이론에 동감하게 된다. 나는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 안에서 의미있는 진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실제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나의 첫 저서인 《현대예술의 의미》로 시각을 돌리게 한다. 나는 그 책에서 당시 프랭크 스텔라에 의하여 대표되었던 미적 이론을 반박하였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의미들을 직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실주의, 즉 ‘새로운 사실주의’ 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며 결론을 내린바 있다.

스텔라는 당시 다른 현대의 작가들과 함께 현재성을 강조한 예술을 하였었다. “나의 작품들에서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은, 그리고 내가 내 작품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대했을 때 혼돈스러운 잡음없이 바로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당신의 앞에 놓인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얻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곧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지 다른 이중적인 의미나 그 너머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없애버리자는 사고였다.

즉, 예술은 더 이상 하나의 암시적인 의미를 표현하거나 수수께끼가 되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물질’은 ‘정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술품은 의미를 버린 채 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 자체의 존재성을 위하여 작가는 의미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물질주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물질주의는 의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이렇게 의미를 찾으려 하다가는 그 물질의 현존적인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는 이론도 나올 수 있다. 가령 글자가 인쇄된 한 장의 인쇄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신이 매일 읽는 신문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심취되어 당신은 그 문자들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도 잊고 있을 것이다. 문자들은 이렇듯 물질로서 올바르게 작용하였을 때에 투명한 물질이 되어 그것이 처음에 하려고 하였던 역할을 완수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문자들을 통과하여 그것들이 주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문자들은 카메라나 혹은 작가들에 의해서 크게 키워지기도 한다. 그것들은 처음에 맡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브루수 나우먼이 작업에 사용했던 것같이 AH HA 라는 문자들로 재현되기도 한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 한때 의미가 충분하였던 문자들은 문자 그 자체가 하나의 물체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었을 때는 반전이 일어난다. 문자들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사람들이 보통 놀랐을 때에 드러내는 단순한 표현이 갑자기 부풀려져 소리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침묵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끝없는 대화들은 곧 침묵을 덮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나우먼의 작품을 화랑에서 본다면 그들은 쉽게 그곳에 의미를 부여해버릴 것이다. 그것을 현대예술의 한 측면으로 이해하고 아우라를 통하여 신성함을 나타내줄 수 있는 추상회화로 판정할 것이다. 어떻게 벤야민과 보들리에를 읽으면서 성장한 현대 평론가가 현존에 대한 찬미를 할 수 있을까?

 

나우먼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우라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나우먼은 말레비치가 그의 신비로운 작품 〈아하 - 체험(Aha-Erlebnis)〉을 통하여 추구한 바 있던, 즉 거의 아무런 형상도 그려지지 않는 캔버스의 침묵이 줄 수 있는 의미를 관객들이 그 빈 공간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했다. 하지만 나우먼의 ‘AH HA’ 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말레비치의 의문점을 더 심도있게 경험하게 해준다.

나는 이 상황에서 아주 자신만만한 관객이 자신있게 “Aha!” 하면서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임금님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추상회화의 흐름으로 간주함에 따라 나우먼의 작품은 존 발데사리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2차원의 화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것이 없다〉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크 로센탈은 나우먼의 그 작품을 〈순수 추상 비판전〉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다른 점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발데사리의 작품 제목이 도리어 그의 작품을 더 실감나게 하지 못했을까.

 

분명히 그 검은 마크들은 하얀 캔버스의 침묵을 깨고 있다. 말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그 제목은 우리들을 점점 더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들은 그 검은 마크들에 쏠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작품에 있어서 의미를 모두 버리게 한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하고 의미없는 작품을 우리들로 하여금 보게 하듯이. 여기에서 물질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은 도리어 더 분명해져야 하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텔라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현전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찬미는 “작품은 존재하는 정신성의 현존”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들의 이론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의미와 물질의 관계를 엮어주지는 못한다. 이렇게 불분명한 관계는 도리어 우리들에게 의미를 줄 수 없는 물질들, 그러나 종국에는 의미를 완전히 저버리게 하는, 즉 의미가 있음에도 의미를 보지못하게 하는 물질들을 남겨준다.

이렇게 분리된 의미와 물질 사이의 공백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 분석 방법을 필요로 한다. 의미가 계속 발견되려면 의미는 물질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질은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될 때까지. 현대에 들어와서 얼마나 많은 물질 안에서 새로 승화되는 의미에 대한 논란이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자연과 물질에 대한 연구와도 흡사한 것이다. 이 연구 안에서 물질은 그 순위에서 뒤로 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이론들이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이성이 지어 놓은 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창문이 필요하다. 창문을 열어서 우리들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예술이 필요하다.

 

 

 

 

Karsten Harries과의 인터뷰

<질문> 당신은 헤겔과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두고,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술의 역할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진정한 탐구”는, 곧 테크놀러지의 본질은 인간의 도움없이 그 자신의 변화를 이끌 수도 없고 또 인간적으로 극복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답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예술과 철학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쟁점은 테크놀러지 전반에 대한 사회적 이해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는 테크놀러지 가능 영역이 갖는 힘과 그 한계를 인지하는 일이다. 테크놀러지가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과학의 여러 영역을 빠른 시일 내에 분석하여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찍이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테크놀러지가 우리들의 삶을 위협할 때에는 그 합법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학 그 자체의 지적 능력에는 가치라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테크놀러지가 사회내에서 좀 더 확대된다면 우리를 니힐리즘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런 사실로 우리들은 테크놀러지가 가치를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자율적 인격체로 승격되어서는 안 된다.

 

 

<질문> 인간과 동일한 지능을 가진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이런 노력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논변 또한 제출되고 있다.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나는 테크놀러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공적인 지적 능력과 인간의 지적 능력 사이에는 도저히 연관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나보다 인간 뇌의 구조를 더 잘 아는 학자들은 이렇듯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불확실성 이론’이 적용될 수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마이크로 스케일의 작업을 컴퓨터가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가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지적 능력에 대한 차이점이 끝까지 넘어서면 안되는 벽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이 테크놀러지의 한계점을 밝혀주는 가운데 인간 존위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21세기 예술의 주된 흐름이라 할 수 있는 ‘테크놀러지 아트’를 둘러싼 논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복합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나 역시 테크놀러지 아트가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테크놀러지 아트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매혹적인 힘에 반하겠지만, 또한 그것이 주는 한계에도 싫증을 느끼리라 예견된다. 현실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들이 없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와 함께 이 모든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도 더 깊어질 것이다. 테크놀러지 미디어 아트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시도한다. 그 주요 수단은 디지털 시스템일 것이다.

 

 

<질문>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시스템과 다르게 제공하는 예술적 소통체계의 변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답변> 뉴미디어 테크놀러지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도구(tool chara - cter)라는 생각은 이러한 부류의 예술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강해질 것이다. 즉, 테크놀러지 예술은 자신만의 강하고 자유로운 힘을 발휘하는 과정 속에서 ‘빈곤함’또한 눈에 띄게 될 것임을 예견한다. 이런 진행과정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한다는 탈출구로 다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본문에서 말했듯이, 인간을 초월적인 세계로 인도해줄 창문은 열려야 한다.

 

 

<질문> 이미 마샬 멕루한은 구텐베르그식 활자문화의 종언을 선언하지 않았는가. 이른바 멀티미디어 시대에 예술가에게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는 예술 창작의 개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답변>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한때 구텐베르그의 프린팅 프레스가 예술의 전통적인 개념을 깨버렸다고 말했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자혁명도 마찬가지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본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 현실은 점점 더 우리들에게 현실 그 자체보다 더 다가온다. 이런 위협 속에서 예술이 한번 더 현실의 진정한 의미, 즉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것이라고나는 믿고 있다. 가상은 가상으로밖에 끝날 수 없다. 가상 음식은 우리들에게 어디까지나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이다.

 

 

<질문> 생명에 대한 존중, 자연과 인간의 합일, 인간과 기계 혹은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조화는 21세기의 주요 관심사다. 이에 따라 이미 하이데거의 관심사였던 ‘진리를 밝히는 예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

<답변> 뉴 테크놀러지 아트가 나타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예술의 형태들을 마치 과거의 것으로 간주하며 그 생명력마저 없어질 것이라고 예견들을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런 위협은 전에도 있었다. 프린팅 프레스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그랬고,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에도 예술은 마치 커다란 위협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제 프린팅 프레스와 사진의 자리에 컴퓨터가 들어선 것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이렇게 예술의 형태가 완전히 변형될 것이라고 위협받을 때마다 예술은 다만 그 기능의 일부를 잃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본문에서 밝혔듯이, 물질 내에서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 예술작품은 흡사 사람의 얼굴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과연 테크놀러지 아트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궁금하다.

 

 


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 1937년 출생. 예일대학 박사학위(Ph.D) 취득(1962년). 주요 저서로는 《Ba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n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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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감성과 과학적 이성 접목해야

더 창의적인 사회로 가려면

김제완 과학문화진흥회장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 | 제43호 | 20080105 입력

 

 

 

 05235042.jpg
우리의 과학교육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대부분의 국민이 초·중·고 12년 동안 수학을 배운다. 하지만 국민의 99%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빼고 보태고 곱하고 나누는 수준을 넘어서는 수학을 쓰는 예가 거의 없다. 이 정도라면 왜 12년의 긴 세월이 필요한지 납득하기 어렵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말로는 과학만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속 다르고 겉 다른 말인 것 같다. 법률과 정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회와 경제에 대한 상식은 지식인이 꼭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과학은 오히려 잘 모르는 것이 덕목이고 과학이란 속 좁고 무식한 ‘공돌이’의 얕은 교양이라는 생각을 은근히 비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넘치고 있다.

 05235106.jpg 에셔의 39천국과 지옥39같은 무늬가 연속되는 형태인 프랙탈 개념을 회화에 적용했다. 검은색을 보면 박쥐가, 흰 바탕을 보면 천사가 보인다. 프랙탈 수학적 개념은 20세기 들어 처음 정립됐다.중앙포토
왜 그럴까? 과학은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적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몰라도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나라가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프로젝트 2061’이다. ‘전 미국인의 과학화’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과학을 사회 친화적으로 접근하자는 시도다.

우리는 과학을 수학·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과 같이 과목별로 인위적이고 딱딱하게 구분해 마치 서로가 연관이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프로젝트 2061’은 이를 탈피해, 예를 들면 ‘사회와 에너지’라는 제목하에 사회에 필요한 에너지 개발·공급 등에 관련되는 과학을 설명하면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등을 자연스럽게 알게 한다.

 05235115.jpg
미국은 1995년에 시작해 2061년에 완성하는 야심적인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핼리 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온 95년부터 그 혜성이 다시 나타날 때인 2061년까지를 연구기간으로 잡았다.

우리도 하루 바삐 과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과학이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의 대중화’에 예술과 문학을 접목하는 것이 과학 속에 숨어 있는 감성을 표면화하고 어려운 과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예를 들어보자.

공간 전체를 몇 개의 모양으로 표현한 에셔의 미술 작품은 수학의 대칭 개념을 아름다움과 감성에 호소해 표현하고 있다. 미국 작가 잭슨 폴락의 작품에서는 ‘프랙탈(Fractal)’과 ‘카오스(Chaos)’를 표현하고 있다. 프랙탈이란 수학에서 도형의 어느 부분을 확대해도 전체를 볼 수 있는 구조를 이른다.

놀라운 것은 폴락이 프랙탈·카오스 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보다 훨씬 앞선 195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작가라는 것이다. 입체파와 초현실파 화가들은 4차원의 세계를 표현하는 ‘마라 부인’ ‘사차원 십자가의 예수’ 등의 작품을 내놓았고, 과학소설가 조지 웰슨의 소설 ‘타임머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앞서 미래사회를 표현했다. 미술·소설의 상상력이 실제 과학을 앞선 것이다.

음악만 해도 그렇다. 그 옛날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적인 접근으로 음악이론을 개발했고 기하학적으로 이상적인 입체(Platomic solid)를 이용해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어 이로부터 ‘천체교향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현대 과학자들은 팽창하는 초기 우주의 소리를 재생하고 DNA 속 염기소의 스펙트럼을 음악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미술과 음악, 문학과 종교는 과학과 얽혀 있고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 대통령이 국민이 원하는 바를 따라가야 하듯, 과학도 사회가 싫어하는 어렵고 딱딱한 요소만 고집하지 말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에 호응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전문적인 과학기술자의 교육은 따로 하되 모든 국민을 위한 과학교육은 감성에 호소하고 사회 친화적이어야 한다.

배울 때는 조금 알다가도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잊어버리는 과학교육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던 제임스 코난트의 말로써 바람직한 과학교육을 대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교육이란 배웠던 모든 것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남는 그것을 말한다.”


음악과 과학의 만남

우주 탄생의 교향악 =미국 버지니아대의 마크 휘틀 교수, 지난해 6월 빅뱅 60만 년 후 발생했던 우주배경복사(CMB)의 최신 데이터를 분석해 우주 탄생의 소리 포착. 빅뱅 후 처음 100만 년 동안 밝은 장3도 음정에서 어두운 단3도로 바뀌었다고.

태양이 만들어낸 화음=태양계의 행성이 저마다 음을 가지고 돈다는 피타고라스의 ‘천체의 화음’론에 이어 케플러는 1619년 ‘천구의 교향악’ 작곡. 지난해 내한한 미국의 크로노스콰르텟도 태양의 이글거림을 수학적 논리로 작곡한 ‘Sun Rings’ 연주.

DNA의 진동 음악=DNA를 구성하는 티민·아데닌·구아닌·시토신의 진동 파장을 늘려보면 구슬픈 퉁소 소리 등 서로 다른 악기의 연주를 듣는 듯하다.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도 진동 파장을 늘리면 아코디언과 실로폰의 합주를 들을 수 있다.

 


정리=윤아름 인턴기자

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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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월간미술 뉴 밀레니엄 특별기획에 기고된 심광현교수의 전문 내용입니다.

 

 

 

art1999.jpg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이후, 20세기 미술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으로 일관해 왔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비평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게 된 일련의 흐름은 새로운 비평 영역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세기의 전환을 앞둔 지금,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구조주의에 자신의 공백을 내어놓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 역시 모더니즘의 공백을 채우지는 못하였다.

 


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비평적 행위다.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대신 행위의 ‘대상’에 대한 반성과, 반성의 근거와 방법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데에, 말하자면 어떤 행위와 행위의 대상을 ‘메타화’한다는 데에 비평적  행위의 특징이 있다면, 미술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메타화’ 방식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미술비평의 역사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나타나는 어려움의 하나는 20세기 미술의 역사 자체가 이미 이와 같은 ‘메타화’방식의 역사였다는 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이래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합의된 ‘미술작품’의 개념을 전제했던 과거 미술의 역사와는 달리 ‘매번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들’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창작 행위의 주안점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한다”데에 놓여 있다면, 창작과 비평의 전통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창작 자체가 매번 일련의 비평 행위가 된다.

20세기 미술에는 미술작품은 없고 미술에 관한 담론(painted word)만이 무성하다는 비판(톰 울프)은 이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함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이런 현상은 역으로 ‘비평 영역의 확장’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에서의 비평에는 ‘미술행위에 대한 비평’만이 아니라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함께 포함될 수 밖에 없고, 바로 이런 지점에 주목할 때라야 20세기 미술비평이 그 이전과 구별되는 중요한 분수령이 포착되지 않을까 싶다.

뒤샹이 제기했던 바와 같은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골치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미술을 대할 때, 통상은 문제시 되지 않았던 ‘미술작품’의 개념이 곧바로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술을 ‘감상’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이 감상하려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감상’이라는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주어진 문제를 풀려고 공식을 찾는 사람에게 문제란 무엇인가를 되물음으로써 ‘공식’의 중요성을 해체하는 것과 비슷하며, 문제를 ‘푸는’행위의 의미를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의 맥락 속에 재배치하는 것과 비슷하다. 1962년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문제 ‘풀이’행위의 암묵적 기반이 되고 있는 문제 ‘제기’의 맥락적 배치를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개념화시킴으로써 이런 메커니즘을 ‘명시화’한 바 있다.

비교하자면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은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패러다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로잘린 크라우스가 <조각 영역의 확장>이라는 글을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황에서의 제작이란 제한된 매체-조각이라는 것-에 관련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련의 문화적 개념에 의한 논리적 운영”에 연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마르셀 뒤샹의 문제 제기를 60여 년이 지나 개념적으로 명시한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제작의 초점은 매체나 표현 양식의 수준(문제 풀이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문제 제기) 수준에 놓여 있다는 것인데, 이를 매체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은 마치 뒤샹의 ‘변기’자체의 작품성과 미학적 특질을 감상하려는 것과 같은 ‘오해’를 유발할 뿐이다.

행동주의 - 소통·참여의 과정

모더니즘이 매체의 순수한 물질성과 형식성을 중심으로 닫혀진 미술작품의 개념을 전제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이 문제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닫혀진 미술작품의 개념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은 매체에서 ‘장’(field)의 차원으로 비평의 초점을 이동시킴으로써 모더니즘 비평이 혼란스러운 절충주의라고 매도했던 많은 작업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린 공간이 사실상 절충주의의 ‘합리화’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비평적 기준이 새롭게 마련될 수 있는가? 매체(의 물질성과 형식성) 중심의 패러다임의 붕괴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의 논리적 운영의 기준은 무엇인가?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비평은 이런 기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다임 논쟁에서 엇나가는 또 다른 축이 존재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미술, 행동주의 미술과 연계된 비평적 쟁점이 그것이다. 때때로 이 쟁점은 ‘리얼리즘’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정치적 미술, 행동주의 미술의 오랜 전통은 장르적·매체적 기준에 의해 한정된 양식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년대의 하트필드식, 60년대의 팝아트적인 ‘정치적 모더니즘’을 환기해 보라).

미국의 대표적인 행동주의적 페미니스트 비평가인 루시 리파드나 영국의 존 A. 워커와 같이 정치적 미술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의 작업이 초점을 두는 지점은, 특정 매체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미학적 효과를 중시하고, 개인적인 체험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소통의 일부로 작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정치적 미술, 또는 행동주의 미술의 본질은 특정 장르나 매체의 관습이나 양식에 한정된 닫힌 작품 개념이 아니라, ‘소통하고 참여하며 함께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자이자로서 다수의 이벤트들을 기획해왔던 수잔 레이시는 95년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라는 제목의 책을 편집하면서, 지난 30여 년간의 행동주의적 미술의 성과를 기존의 제도 공간에서 행해진 환경 조형물로서의 ‘공공 미술’과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에 의하면 이 개념은 관객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쟁점들을 가지고 관객들과 소통하고 상호작용하기 위해 전통적인 매체와 새로운 매체 양자 모두를 사용하는 참여적인 시각예술을 총칭한다.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는 작가는 사적 체험의 경험자이자 리포터로서, 또는 분석가이자 행동주의자로서 다양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관객 역시 능동적인 참여자에서부터 역사적인 회상자에 이르는 다양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매체의 경계로부터 벗어난 미술을 지칭하기 위해 60년대 후반부터 사용된 ‘새로운 장르’라는 개념과, 내재적으로 사회적인 ‘개입’의 성격을 지닌 ‘공공 미술’개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개념은 위에서 말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개방한 ‘열린 작품’의 다원적 공간에 일련의 방향성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글로벌·로컬의 이중화

20세기 서양의 미술과 미술비평이 실제로 어떤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는가의 문제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응용했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서양에서는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상이한 패러다임들이 비록 앞의 두 축의 지배적 우위 하에서이긴 하나 경쟁적이거나 상호 침투적·접합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반면, 우리의 경우는 1920∼30년대의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우 오랫동안 정치적 미술의 패러다임은 서구미술 및 미술비평의 수용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되었고, 3자의 역동적인 관계는 거의 조망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미술 수용사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고, 정치적/ 행동주의 미술의 패러다임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기 시작된 것은 80년대 초기 민중미술운동의 발화를 계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의 격렬했던 정치적 상황은 초기에 최민·성완경 같은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가능성들을 문화적인 맥락에서 치밀하게 검토할 반성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80년대 말에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 논쟁의 과도한 영향 속에서 도식적인 리얼리즘 양식론의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비평적 초점이 패러다임 수준에서 매체와 장르 중심의 닫힌 작품 개념의 수준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위 ‘제도권’의 일부 미술비평가들 사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수용이 이루어졌지만, 이 역시 문화적 개념들의 논리적 운영이라는 차원보다는 양식상의 비교 수준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철저한 오독을 야기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서양의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입체적인 궤적이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이며, 이 과정에서 ‘패러다임’‘담론적 배치’‘문화적 개념들의 논리적 운영’과 같은 수준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9년에 결성되었다가 93년 초에 해체한 미술비평연구회의 활동에서 이와 같은 80∼90년대로의 이행기의 한계와 성과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미술행위의 문화정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페미니즘과 문화 연구, 후기 구조주의 철학 등의 수용 과정에서 가속화되었지만, 이런 인식의 세련화는 논쟁적 열기를 수반하지는 못했고, 다만 도시·대중매체·섹슈얼리티·젠더·에콜로지 등을 주제로 한 일련의 기획전시회들을 통해 소단위별로 분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서 95년 광주 국제 비엔날레의 개시를 전후로 국제 교류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서서히 부각되고 있는 쟁점의 하나가 ‘글로벌/로컬’((global/local)의 이중화 문제다.

위와 같은 기술이 20세기 미술비평의 국내외적 흐름의 전모를 조망해줄 수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미술을 이끌어온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지배적인 미술제도의 틀 안과 밖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정치적/행동주의의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나아가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전통은 본래가 매체가 아니라 ‘참여와 소통’이라는 문화적 맥락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미술=리얼리즘 양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해야 한다.

둘째, 철저하게 사적인 경험과 닫힌 작품 개념에 기반했던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붕괴로 나타난 공백을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의 개인주의 문화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형(탈중심적이고 복수적이면서도 네크워크식으로 연결되는 공생체적인)의 문화적 공공 영역을 가능케 하는 계기로 활용할 것인가의 여부다. 포스트 모더니즘·포스트 구조주의가 답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며, 바로 여기서 창조적인 역할이 적극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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