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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은 예술의 미래인가

조회 수 8388 추천 수 0 2010.02.08 10:20:55

분절과 조합, 무한복제, 혼성과 차용, 변형이 자유로운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미술작품이 늘고 있다. 전시장이나 이벤트홀 또는 인터넷과 CD-롬 등을 통해 이미지·동영상·사운드 뿐 아니라 인터액티브한 요소까지 갖춘 작품들이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주목받는 것이다. 정보사회와 흐름을 함께하는 디지털 아트의 부상 원인과 그 득실을 살펴본다.


art1.jpg ▲ 김윤 <가상 공간에서의 유희> 멀티 큐브, 모니터 3D 애니메이션 1분 50초 400×400×320cm 1998

최근 ‘멀티미디어 시대의 미술’을 논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심심찮게 열리고, 디지털 환경의 대두가 파급시킬 미술 문화적 파장에 대한 비평적 논의도 잦아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국내의 한 통신회사에서 신축사옥의 1% 환경조형물 설치를 위해 멀티미디어 아트를 대상으로 지명 공모를 실시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멀티미디어 아트가 이미 현대미술의 한 양식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며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미술의 개념과 존재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아트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된 것이 아니고, 용어도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멀티미디어 아트의 범주를 복합감각적 작품까지 포괄해서 보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작품에 구현된 경우에 한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디지털 테크놀러지 자체를 오늘날의 문화적 조건을 규정하는 결정요인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있다면, 멀티미디어 아트를 동시대의 인식적 전환과 관련된 문화적 맥락으로 이해하는 상반된 관점이 병존하고 있다.

매체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술결정론적 시각과 문화결정론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들은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테크놀러지와 문화 사이에 인과적 결정요소가 있든지, 아니면 양자가 필연적으로 병행하든지 간에 그 현상적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디지털 환경이 이미 일상화된 현실로서 여타 사회문화적 인자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동시대의 문화지형을 변동시킬 민감한 징후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영향은 작가의 위상이나 창작 조건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생산과 향수, 문화의 전유와 분배에 걸쳐 연쇄적인 변화를 부르고, 나아가 문화의 형질과 제도적 지형 전반에 근원적인 변동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매체의 수용양상

동시대 소통체계의 확장과 재편성을 주도하고 있다는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영향은 굳이 첨단 매체를 도입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미술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가령 홍승혜의 회화 <유기적 기하학>에서 ‘분절과 결합’을 통해 증식하는 그리드(grid)에서도, 거슬러 분열된 여성의 정체성을 암시했던 조경숙의 사진 <연출된 육체>에서 마치 톱니처럼 분절된 스텝으로 연속된 여성의 이미지에서도, 미니멀하고 극도로 정적인 박현기의 비디오 설치 작업에서도 디지털적 속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art2.jpg ▲ 신일섭 <한 마리의 개> 비디오 프로젝션 전시장면. 1997 만화 형식의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 이성강 씨를 중심으로 최철영·유진희·신일섭·홍승희 씨가 애니메이션 그룹 ‘달’을 결성, 2편의 CD-롬을 제작, 멀티미디어· 가상현실· 인터액티비티 등을 첨가하였다. 신일섭의 작품은 그 첫 CD-롬인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마우스 포인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디지털 출력물이 버젓이(?) 작품으로 전시되는 현실에서 원본과 사본, 유일성과 복수성, 의도와 인과성 사이의 경계에 대한 질문들은 이미 해묵은 문제 제기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미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속성(digitallity)’이 오늘날 우리의 인식틀을 반영하는 징후이자, 동시대성을 상징하는 보편 인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판화나 회화와 같이 전통적인 미술영역에서도 디지털 매체가 창작의 도구나 표현의 수단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이것은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이 회화처럼 그리거나 사진처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조합·합성의 ‘중계적 처리’를 통해 수행되기 때문에 이미지의 임의적인 조작과 유연한 변형에 강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디지털 매체가 직접적으로 작품에 도입된 미술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회화와 판화, 사진과 영상미술 등 기존 미술 형식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미술영역간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매개적 프로세스’가 동시대 미술에 개입되는 현상을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속성과 관련하여 거론하자면 그 양상은 몇 가지로 유형화될 수도 있다.

그 첫째가 ‘분절과 조합(絶合)’의 양상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샘플링(sam-pling)과 필터링(filtering)을 통해 모델을 추출하고 이진 코드로 정식화되어 형성된다는 점에서 분절과 그 단편들의 조합은 디지털 매체의 본질적 속성이다. 가령, 홍승혜의 작품들은 포토샵을 이용한 디지털 출력을 전사한 것이지만, 분절된 단위 패턴들이 동어반복적 조합을 통해 ‘유기적(기계적?)’으로 증식하는 구조이다.

디지털 영상의 기본 단위인 ‘픽셀(pixel)’을 확대하면 ‘데카르트의 그리드(grid)’와 동일한 형태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지독한 역설이지만, 반대로 매체의 본질에 대한 그 역설적 통찰로 인해 그 작업이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ar3.jpg ▲ 이윰 <하이웨이>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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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륜 <말> 컴퓨터 합성 이미지 비디오 프로젝션 1997
둘째로는 반복과 무한복제적 양상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진숫자로 약호화된 후 디스플레이된다는 점에서 ‘2단계 예술(two-stage)’이고 무한히 예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서적(allographic)’ 예술이다. 반복 복제가 잡음과 질적 저하를 부르는 아날로그 이미지와 달리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과 동일한 무한복사가 가능하고, 원작과 사본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기억장치에 남겨지는 복사시간(time-tag)뿐이다.(이것도 마음만 먹으면 삭제하거나 조작이 가능하다.) 흔히 고급예술에서 약탈한 아우라를 표백시키거나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무차별로 전사할 때 나타나는 양상들이다.

셋째는 ‘차용과 혼성’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차용과 재처리·재결합에 의해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연산적 레디메이드로서, 포착되는 모든 이미지를 스캐닝된 사진이나 합성된 원근법, 그리고 전자 페인팅을 통해 응집된 전체 속에서 유연하게 용해시킨다. 가령 동서양의 이질적 패러다임이 마찰하는 염창미의 디지탈 합성 사진, 그리고 현실과 영상이 동일한 조작적 층위에서 충돌하는 강홍구의 컴퓨터 포토몽타주들은 혼성된 이미지의 파편들이 무차별한 브리꼴라주(bricollage)의 양상을 보여준다.

넷째는 변형과 변성, 그리고 응축과 변조이다. 그것이 인간의 지각 수준을 넘어서는 속도에 의해서건, 경험적 예측을 뛰어넘는 알고리듬적 프로세스에 의해서건, 대상의 변형과 시공간의 응축·변조는 모든 전자매체의 기본적 속성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컴퓨터 이미지의 탈물질화란 사실상 끝없이 변조·변성·변형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최지안과 이윰 등의 작품에서 신체를 매개로 여실히 나타나는 이러한 양상들은 주체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인식됨으로써 일면 자기 정체성이 부재한 타자로 이해되는 동시대의 매체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영상세대의 디지털 언어

디지털 매체가 변혁의 징후와 잠재력을 지니는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매체가 편재된 오늘날의 시각문화 속에서 최적화된 인터페이스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사진과 영화와 비디오 등 전통매체의 기능을 확장하고 성격을 변화시킴으로써 이미지 프로세싱과 시뮬레이션, 그리고 상호작용적 작동에 완전히 새로운 양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네트워크는 기존하는 여러 미술 흐름들을 하나로 접속시키고 그 속도를 증폭시켜 다방향으로 분열시키고 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 대량 생산된 기성품을 차용하는 방식이 현대미술에서 개념적 혁명을 주도했다면, 이러한 양상은 미술에서 나타날 질적 혁명의 또 다른 징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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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규태 컴퓨터 프린트 1999 사진의 특정 부분이나 인쇄물을 스캐닝하고 컴퓨터 상에서 확대시킴으로써 생긴 픽셀 이미지를 선택, 프린트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레디메이드’가 기계 테크놀러지의 산물이고 컴퓨터의 ‘알고리듬 절차’가 전자 테크놀러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양상은 정보사회의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한 유력한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혹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부호체계는 이진법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만을 강요할 뿐 개념이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적다. 또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절차의 일방성은 사전에 예정된 결과만을 산출함으로써 의미의 희박화와 미적 체험의 단편화를 초래할 위험을 지닌다.

결국 컴퓨터를 이용한 이미지의 (재)생산은 우연성과 임의성의 개입을 극대화하는 측면과 대수학적 언어의 연산과정에서 나타나는 획일성과 표준화의 이중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가령, 동영상의 속도감이나 컴퓨터 그래픽의 현란함은, 역설적으로 패턴화된 변화의 압도적 효과 때문에 작품의 개념성이나 의미내용이 개입될 여지를 더욱 줄인다. 그것은 ‘현란한 변화 속에 나타나는 또 다른 정체’이며, 반복되는 정체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퇴행 쪽에 가깝다.

실제로 컴퓨터를 직접 매체로 도입한 미술은 국내외에서의 활발한 실험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에서 평가가 유보되거나 절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이 급변하여 ‘비디오 아트’처럼 제도권의 중심부에 극적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통해 무차별로 양산되는 ‘프랙탈 이미지’들이 순수미술의 문맥에서 ‘테크노-키치’라는 형편없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단지 효과만을 의도하여 하이 테크놀러지를 도입한 결과 작품 자체의 개념이 모호해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거대자본에 밀착하여 전시가 이벤트화하거나 공학적 프로젝트의 부대효과로 전시가 추진됨으로써 작업의 진정성이나 작품의 개념성을 확보할 겨를이 미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디지털 환경의 최대 수혜자는 시각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영상적 감수성을 키워온, 이른바 ‘비주얼 세대’가 될 것이다. 복합적·관계적·유동적 문화를 반영하는 멀티미디어 아트를 거론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하는 작가들도 바로 이들 젊은 작가군이다. 이 작가들은 공공연히 탈제도-반제도를 표방하기도 하지만 사실 제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상윤·이중재· 이성강· 박명천· 전승일 등 ‘언더’의 정신과 ‘인디’의 근성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어쩌면 멀티미디어 시대의 압도적 속도감에 감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류인지도 모른다.

art6.jpg ▲ 홍승혜 <유기적 기하학> 카드보드에 세리그라피, 나무에 폴리우레탄 코팅 30×2.2cm×8 1998
컴퓨터 아트의 신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가들이 그들의 선배 세대, 즉 컴퓨터 아트의 1세대 작가군 (양진식· 김윤· 최은경· 신진식 등)과 다른 점도, 이른바 ‘순수’에 대한 콤플렉스를 별로 지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의 작업 방식은 ‘순수’ 쪽으로 추파를 던지기보다는 상업미술의 대중성과 소통 가능성을 강변하는 쪽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 그리고 상업적 소프트웨어를 도구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디자인과 광고, 회화와 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은 ‘탈장르라는 장르’를 만들거나 경계 너머로 담장을 쌓는 기성 작가들의 이중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만화를 발표하면서 CF를 찍고, 웹 디자인에 몰두하던 작가가 느닷없이 패션회사에서 일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이미지의 편집자이자 중계자·연출가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 중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미술제도권으로 진입하여 순수미술의 맥락에서 평가받느냐도 관심 사항이다. ‘탈제도-복합미술’을 공언하는 이들의 작업 방식이 역으로 그 개념적 급진성과 탈제도적 형식의 새로움으로 인해 제도권에 포용될 때 이들이 어떤 진로와 좌표를 취하느냐도 흥미로운 일이다.

대안 매체로서의 인터넷

국내에서 인터넷이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이었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광대역 통신망은 전 지구를 전자적으로 감싸버릴 정도로 인상적인 확산 속도를 보여주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인터넷을 직접 매체로 도입하거나 전달매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소박한 ‘전자식 포트폴리오’에서부터 정교하게 설계한 가상 갤러리 형식, 그리고 본격적인 ‘웹 아트 프로젝트’라고 할 만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다양하다.

art7.jpg ▲ 양진식 <로그인 이미지 Ⅱ> 2D 애니메이션 5분 1999 수화하는 손의 이미지를 그래픽으로 처리했다. 텍스트에 의한 의사전달이 아닌 이미지에 의한 소통 방식인 수화의 이미지에 착안했다.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인터넷의 무제한적 확장성과 상호작용성, 그리고 실시간 즉시성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며, 몇몇 작업들은 대안적 소통의 가능성과 탈제도적 매체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작업들은 유형화나 양식적 분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미술제도적 분석이나 형식주의적 접근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대개 집단 단위로 창작되고 진행형의 상태로 운용되는 이 프로젝트들은 순수미술뿐만이 아니라 만화와 사진, 광고와 영상, 디자인과 패션, 비평적 시각과 상업적 의도가 뒤섞여 있어 개념적 정의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웹 아트 프로젝트에서 가장 특징적인 국면은 미술에서 언더 그라운드로 분류되거나 주변부에서 머물던 만화, 에니메이션, 광고이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이 전면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블라인드 사운드(www. bd.co.kr)·푸른사람들(www.blupers. com)·아트21(www.arts21.com) 등은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들이다. 이 작업들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디자인적 기교나 기술적 완벽성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매체/매체환경의 속성과 혼성적 소통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다거나, 비판적 의미내용을 전략적으로 부가시킨다거나, 일상의 이면에 매몰된 이야기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의 수평적 확대와 대안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예술매체로서의 인터넷의 가능성을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국내에서 가장 충실한 작업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먼저 ‘사이버 스페이스’를 둘러싼 그간의 논의들에 잔뜩 거품이 붙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넷의 대안적·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예술매체로서의 가능성이 턱없이 과장되었거나 축소적·부정적 국면을 간과한 일면이 분명히 있다.

art8.jpg ▲ 제니퍼 조 <마음의 길> 캔버스에 컴퓨터 프린트 설치(부분) 1997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한 부분을 컴퓨터로 재구성, 수백 개의 캔버스를 타일처럼 반복시켜 거대한 벽면을 만들고 있다. 겸재 산수의 격조와 자연관을 디지털 프로세스로 복원한 그의 작품은 테크놀로지의 건조함과 기계성을 넘는 서정적 풍경을 만든다.
사실 ‘개념이나 의미내용’(콘텐츠웨어라고 해도 좋다)이 아예 없거나 빈약한 작업들을 평가하라는 것은 비평적으로는 넌센스에 가깝다. 개념이 없고 감각적 공감이 없다면 비물질적 가상공간에 떠도는 것은 창백한 이미지와 표백된 메시지들뿐이다. 광대역 소통이나 상호작용적 효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 한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라도 정교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현실의 무한한 맥락을 내포할 수 있다. 사실 형식면에서 인터넷과 컴퓨터는 강점보다 제약이 더 많은 예술매체이다. 장래에 인터넷을 활용한 미술의 의미는 정교하게 조작되어 부가된 메시지나 탈제도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맥락, 그리고 혼성적이고 가변적인 문화에 대응하는 유연화된 개념에 의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명암

컴퓨터와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디지털 매체는 기존에 통용되던 재현의 담론을 뿌리부터 전복시키고, 이미지 사이의 위계나 특권적 위치를 실질적으로 소멸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의 존재방식이 시공간의 구속과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작가의 위치와 창작의 조건에 광범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더 나아가 탈물질화되고 탈개인화된 디지털 이미지는 개인적 작가의 주체성을 교란시켜 복수적 작가의 가능성을 대두시키고 생산자-수용자의 관계를 재정의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위치는 더 이상 특권적 권위를 지닌 창조자가 아니라, 시각정보의 수집자나 편집자의 입장으로 변동될 지 모른다. 이러한 예측들은 부분적으로 과장되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적실한 예측들이다. 이것은 또 먼 미래에 대한 성급한 예상일 수도 있지만, 이미 ‘디지털 사진’이나 ‘웹 아트 프로젝트’ 등에서 상당 부분 현실화된 양상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 매체는 전통 미디어의 단방향성과 단선적 통제 양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매체보다 민주적이고 능동적인 매체이다. 디지털 매체에 의한 탈중심·재중심·다중심적 소통체계의 편성은 작품의 개방성을 확대하여 일상적 현실과 결부된 역동적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대안적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매체는 증폭/축소, 강화/차감, 긍정/부정의 이중적 특성을 지닌다. 인터넷만 하더라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확장성과 수평적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안으로는 극도로 폐쇄된 소통 형태를 지니고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과 같은 첨단 매체를 이용하는 작업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매체에 대한 기능 위주의 접근과 기술적 효과의 무분별한 추수이다. 가령, ‘웹 프로젝트’에서 나타나는 문제들도 광대역 소통과 온 라인(on-line) 네트워크의 실시간적 즉시성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미적 감흥이나 개념적 신선감을 찾기가 힘들다. 소통의 질이란 소통의 범위나 효과 이전에 개념과 감각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들이 새로운 소통의 채널을 확보하고 대화형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미를 지니지만 소통의 질이나 미학적 성과가 담보되지 않을 경우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art9.jpg ▲ 공성훈 <머리굴리기> 수제 프로젝트 11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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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성훈 <무지류> 수제 프로젝트 6대 1997 10여 개의 수제 슬라이드 프로젝트가 제어기를 통해 점멸되면서 움직이는 화면을 연출하는 공성훈의 작업은 디지털의 단절적인 이미지 유니트와 초기 영화의 움직임에 대한 열망을 공히 연상시킨다.
매체가 위치한 맥락과 상황을 떠나 미술이 효과로 환원될 수는 없으며, 미술의 문맥에서 ‘가치’라는 문제가 쉽사리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사회적 수준에서도 디지털 환경에서 강요되는 선다식(選多式) 소통의 문제점은 여러 논자들에 의해 경고되고 있다. 디지털 매체가 포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무한한 부호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과정은 즉 ‘0과 1’이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참(T)과 거짓(F)’의 이분법, 혹은 ‘예(Yes) 혹은 아니오(No)’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디지털의 속성이 모든 메시지와 기호에 내재된 사회 내에서는 숙고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유희와 오락의 프로파간다만 유포된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의해 전세계가 ‘전자 코팅’되어 버린 오늘날, 정보의 증가가 소통을 개선하고 사회적 이해를 확대해줄 것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믿음에 가깝다. 정보 수용의 임계지점, 곧 적정 잉여도(redundancy)를 넘어선 정보는 사실상의 소음으로서 수용자에게 무반응을 강요할 뿐이다.

이처럼 의미가 유실된 정보가 포화상태로 범람하는 사회에서 미디어의 온도가 올라갈수록 수용자는 싸늘한 결절점에서 침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수준에서도 정보 폭발과 네트워크의 팽창은 의미의 희박화를 넘어 소통의 정체나 급격한 폐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통을 위한 미디어가 의미를 유실시키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도로율이 자동차의 수효를 감당하지 못할 때, 교통(交通)을 위한 자동차가 교통을 정체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제한의 접속과 복제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유희적 기표와 조작적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찬 텅 빈 통신망. 정보의 홍수 속에 나타나는 대중의 실어증과 의미의 진공화는 분명히 전자적 매체환경의 역설이자 짙은 그늘이다.


 

 

이동석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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