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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온라인화 되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사회는 한편으로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현실이다. 미술의 패러다임 자체도 그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다시 재편될 것인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넷 아트의 실례들을 통해 네트워크 상에서 전개되는 아트 프로젝트들의 실험과 성과를 점검한다. 필자는 넷 아트에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공미술을 발견하고 있다.

net1.jpg ▲ 데이빗 블레어 <왁스웹> (jefferson.village.virginia.edu/wax) 홈페이지 데이빗 블레어의 유명한 실험영화 <왁스 혹은 꿀벌들 가운데서 텔레비전의 발견>의 웹 버전. 왁스웹은 처음 머드(MUD)의 변종인 무(MOO) 형식으로 서비스되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는 서사 형식의 선구적 사례로 주목을 끌었고, 최근에는 다시 VRML을 이용한 3D 버전과 CD-ROM 버전을 선보이는 등 꾸준한 업그레이드를 진행해 오고 있다.

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20세기 말의 컴퓨터와 인터넷은 몇 가지 점에서 초창기의 사진이나 영화를 연상시킨다. 새로운 기술의 위력에 대한 탄성과 열광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통적 예술에 대한 불안과 위기의식이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적 신기함을 넘어서지 못하는 예술적 깊이의 박약함에 대한 회의적 시선 또한 만만치 않다.

컴퓨터 테크놀러지를 이용한 미술 창작의 역사는, 초창기 컴퓨터 그래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30여 년에 이르고 국내의 경우도 15년 가까이 된다. 이제는 컴퓨터 테크놀러지가 창작과정의 곳곳에 침투해 컴퓨터 아트· 인터액티브 아트· 미디어 아트· VR아트· 디지털 아트· 알고리즘 아트(algorithmic art)· 넷 아트(웹 아트) 등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외연을 지니게 되었다. 그중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으면서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극적인 전환과 맞물려 특별히 주목받는 바로 넷 아트다.

미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인터넷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될 수 있다. 하나는 인터넷을 일종의 소통의 채널로서 활용하는 것으로, 기존에 제작된 작품의 사진이나 정보를 ‘가상 갤러리’ 형태로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작품을 실물이 아닌 스캐닝된 이미지로 본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또 대다수의 예들이 전시 팸플릿 수준을 넘지 않는 진부한 형식이긴 하지만, 미디어로서의 인터넷의 폭넓은 잠재력을 고려할 때 결코 간단히 넘겨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일차로 이 가상 갤러리는 전시공간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외국인을 포함하여 전시장을 찾을 수 없는 많은 관객들에게 작품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영화의 예를 들자면, 극장을 확보하기 어려운 소규모 독립영화들에게 머지않아 인터넷을 통한 ‘비디오 스트리밍’이 유력한 배급 전략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화와 미술 모두 인터넷을 통한 전시나 배급이 관객의 폭을 넓힌다는 데에 의미가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특성을 이용하여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작가와 관객간의 유의미한 의사소통(예술적 주장, 인터뷰, 논쟁, 관객의 코멘트, 온라인 설문조사 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터넷을 단순한 전시공간의 확장이나 프로모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더 적극적인 소통의 전략을 고민한다고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처음부터 인터넷을 겨냥한’ 창작, 곧 넷 아트로 모이게 된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넷 아트는 일반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측면이 중요하고, 전통적인 작품 개념보다는 좀더 광의의 ‘창작적 실천’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국 넷 아트에서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개입을 고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흔히 웹 아트란 말에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은 추진 배경의 공공적 측면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창작이 지닌 활동이나 프로세스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도 있다.

net2.jpg ▲ 푸른 사람들 이중재씨를 중심으로 웹 아트에 관심을 가진 젊은 작가 몇 명이 함께 만든 '푸른 사람들'의 웹 사이트.
국내의 경우 아직까지 본격적인 넷 아트의 개념으로 볼 만한 작품이나 활동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사례라 할 만한 것이 웹진의 형식을 취하는 블라인드 사운드이다.

주로 미술 및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작가들의 웹 기반 작품들을 소개하는 이 사이트는, 소품 위주이긴 하지만 매우 완성도 높고 창의적인 실험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아마도 쇽웨이브나 플래시를 다루는 기술로는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넷 아트의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기본적으로 인터액티브 디자인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네트워크를 통해 밖으로 연결되는 프로세스보다는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의 결과들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여전히 닫힌 작품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전략에 다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품이 아닌 전체로서의 블라인드 사운드와 그 제작 주체로서의 퍼스널 코포레이션스는, <맥 지저스(MacJesus)>로 유명한 미국의 램프리 시스템스(Lamprey Systems)와 비견될 만한, 매우 유니크하고 매력적인 문화적 실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외에 ‘푸른 사람들(www.blupers.co.kr)’의 작업과 최근 가나 웹 갤러리 (www.ganaart.com)에서 선보인 <명랑 음식점>과 같은 작업도 눈여겨 볼 만하다. 외국의 경우 미술관들이 전시와 연동하거나 또는 별도의 웹 아트 프로젝트로 인터넷을 통한 창작을 적극 기획·지원하고 있는데 비해, 아직까지 국내의 미술관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것 같다.

현실계의 축지법, 인터넷

넷 아트의 진정한 잠재력은 표현기법이나 대중적 전시 효과에 있다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한 리소스(resource)를 수집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즉, 웹을 통한 멀티미디어와 인터액티비티의 구현이 과거에 비해 한층 강력하고 손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대역폭의 문제가 큰 장애로 남아 있고, CD-롬과 같은 프로덕트형 미디어에 비하자면 여전히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 또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것 역시, 체험의 밀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양보를 전제로 한 것이다.


net3.jpg ▲ 센소리엄 센소리엄은 통상적인 인간의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거시적 운동이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보청기라 할 수 있다. 97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디지털 아트의 대표적인 국제 공모전 가운데 하나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지난 95년부터 넷 아트 부문을 신설하여 그동안 많은 넷 아트 작품들을 소개해 왔다.
반면에 넷 아트는 다른 어떤 표현 매체도 모방할 수 없는 굉장한 강점을 갖고 있다. 1997년 오스트리아 방송국이 주관하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www.aec.at) 공모전의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센소리엄(Senso-rium)>(www.sensorium.org)의 예를 들자면, 전세계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에 관한 정보가 매일 서버로 전달되어 웹 페이지의 지구 형상 위에 실시간으로 표시된다(‘숨쉬는 지구’).

그런가 하면, 웹 사이트의 IP(정보제공처) 주소를 인식하는 스크립트를 사용자의 컴퓨터 상에서 실행시키면, 사용자가 전세계의 웹 사이트를 서핑한 궤적이 실시간으로 지도 위에 표시된다(웹 호퍼). 그리하여 단순히 링크에 링크를 넘나드는 브라우저 상의 페이지 뷰의 경험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시 호주를 거쳐 브라질로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왕복하는 감동적인 축지법적 경험으로 재현된다. 이처럼 넷 아트는 종래의 미디어로는 생각할 수 없던 리소스를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로부터 실시간으로 수집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이른바 ‘연결의 마술’을 구사할 수 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전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더글라스의 <세계 최초의 공동문장>(math240.lehman.cuny.edu/sentence1.html) 같은 작품은 연결을 통한 실시간 생성이라는 전략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예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사실상 웹 사이트만 개설해 놓고 전세계의 아무나 여기에 접속하여 텍스트를 쳐 넣으면 마치 무한 증식하는 방명록처럼 뜻도 모를, 각국 언어로 된 문장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덧붙여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연결을 극대화함으로써 전통적 개념에서의 작가의 예술적 재능이나 관여의 폭은 극소화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우리가 작품의 개념으로 접수한다면, 이때의 작품은 프로세스로서의 작품인 셈이며 이 작품은 작가가 임의로 사이트를 폐쇄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계속될 진행형(ongoing)의 작품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테크노스피어(Techno sphere)>(www.technosphere.org.uk)처럼 예술과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혀 색다른 작품도 가능하다. 제인 프로핏이 설계한 이 사이버 스페이스의 생태계에는 수많은 인공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이 테크노스피어 사이트에 접속하여 주어진 몸체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생물을 조립할 수 있다.

이 생물들은 인간은 살지 않는 가상의 생태계에서 생로병사의 순환을 겪으며 쉼없이 나타났다 사라져간다. 이 작품은 지난해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에서 개최된 <이마지나리아(Imaginaria)> 전시에도 버전 2.0으로 출품되어, 과연 이것을 예술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을 야기시켰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제니퍼라는 여성이 집안 곳곳에 카메라를 장착해 놓고 자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심지어 목욕 장면부터 남자 친구와의 잠자리 장면까지)을 촬영하여 실시간으로 웹에 올리는 <제니캠(www.jennicam.org)> 프로젝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여성은 20대 초반의 평범한 웹 디자이너일 뿐이고, 명시적으로 이것을 아트 프로젝트라고 주장하는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제니캠 사이트는 가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나는 제니캠이 단순히 성공한 ‘이벤트’를 넘어, 어느 사진작가의 작품 못지않게 예술적·문화적 환기력이 큰 기념비적인 도큐멘트이자, 어떤 넷 아트의 작품보다도 절묘하게 인터넷의 핵심을 꿰뚫은 도전적인 기획을 했다고 생각한다.

노출과 관음, 센세이셔널리즘과 문화적 기획,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과 같은 주제가 모두 그 의미망 속에 얽혀 있다. <센소리엄>이 리소스의 수집원으로 네트워크를 이용했다면, <제니캠>은 거의 1인 방송적 관점에서 인터넷을 이용했다.

관객에 의한 생장 증식

<제니캠>을 예외로 하더라도, 이들 단 몇 작품만으로도 우리의 전통적 신념은 간단히 혼란에 휩싸여 버린다. 이런 혼란은 넷 아트의 어떤 점 때문에 초래된 것일까? 컴퓨터 테크놀러지의 도입으로 인해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한탄은 이 혼란의 본질적인 국면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사사로운 지적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영화에서처럼 미술에서도 예술이냐 오락이냐는 해묵은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체성의 문제는 좀더 본질적인 국면, 즉 작가와 작품과 관객이라는 가장 근간이 되는 삼각형 내에서 파열하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net4.jpg ▲ <테크노스피어> 사이트의 컨텐트들 유명한 인터넷 3D 채팅 환경인 알파 월드를 연상시키는 테크노스피어의 풍경들. 휴대용 다마고치 장난감 속의 생물들은 테크노스피어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서식지를 찾을 수 있다.

넷 아트에서의 작가의 정체성 문제는 해석학적 지평에서의 이른바 ‘저자의 죽음’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에 현실적인 예술적 생산관계로부터의 소원화의 경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가의 작업 모델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의 요구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 예술관객의 실종이라는 문제도 맞물려 있다. 요컨대 사이버 스페이스란 현실의 미술공간과는 사뭇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술가는 좀더 강하게 현실 미술계의 문맥에 밀착하려는 전략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미술 담론으로부터 과감히 이탈하여 새로운 역할 모델로 이동해 나갈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전시장과 거래를 중심으로 한 작가-작품-중개자-관객의 사슬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현저하게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넷 아트에서 작품이 존재하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형태, 곧 비트(bit)의 형태를 취한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아트의 존재방식이 그러하지만, 예컨대 설치와 결합된 형태의 미디어 아트나 인터액티브 아트와 똑같이 컴퓨터 테크놀러지를 이용했다고는 해도 확연히 구별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넷 아트는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이미지 세트와 프로그래밍 코드(스크립트)가 결합된 형태(물론 이미지만, 또는 코드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넷 아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품의 아이디어· 정보· 리소스 같은 기획적 측면과, 작품이 웹 사이트에 장기간 머물면서 관객과 반응하거나 생장 증식하는 프로세스적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보의 제어와 통신의 구조를 내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사이버네틱스로부터 개념을 차용한 사이버아트(cyberart : ‘cyber’라는 말이 원래 ‘가상의’라는 뜻보다는 ‘control’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의 개념이 어울릴 수도 있다.

넷 아트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다면 거기서의 작가란 전혀 다른 형태의 예술적 훈육을 요구하는, 이를테면 문화 기획자이자 정치 논평가이고, 때로는 특정한 하위문화의 이데올로그이자 선동가이기도 한 사람일 수 있다. 아울러 그(그녀)는 또한 스크립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멀티미디어 디자이너일 필요도 있다.



net5.jpg ▲ 알렉세이 슐긴 <레스크탑은> 러시아 웹 아트의 대표적 작가인 알렉세이 슐긴이 기획한 컴퓨터 데스크탑을 주제로 한 넷 이벤트 <데스크탑은 (Desktop Is)>. 전세계 사람들이 보내온 데스크탑 이미지 수 십여 점이 인터넷 상으로 전시되었다. 이처럼 넷 아트의 미술가는 곧 큐레이터이자 이벤트 기획자이기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면, 필자는 거칠게 말해서, 한국의 미술가들이 일반적으로 미술가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이 매우 강하며, 물질화된 작품을 선호하며, 장르와 미술사의 담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수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우리의 미술계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을 도입하는 데 있어, 어떤 가능성들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데 비해 다른 가능성들은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거나 용인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비디오 아트가 설치 형식으로는 활발한 데 비해 테이프 작업에서는 생각처럼 쉽게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맥락일 것이다. 그 결과, 컴퓨터 테크놀러지가 맥루한 식으로 말해 ‘쿨 미디어’로서의 강점이 많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한국의 디지털 아트는 (흔히 설치의 옷을 입고서) 핫 미디어의 시각적 매력과 임팩트로의 재빠른 방향 선회를 반복해 왔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넷 아트의 활성화를 위해 제안한다면, 이제는 과학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나 창작 도구의 관점에서만 아니라, 진정한 분과 및 직업세계간의 만남으로 기획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테크노스피어>의 경우 예술이냐 오락이냐의 문제를 떠나 인공생명이라는 과학적 견지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좀더 본격적으로 천착해 들어간 것이 알고리듬 아트이다. 21세기가 생물학의 시대라고 예견된다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알고리듬을 생성하는 이 알고리듬 아트야말로 진정 미래에 값할 만한 예술 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창작과정에서의 프로그래머와 미술가의 실질적인 협업도 절실하다. 이런 종류의 협업이 성공적인 예로는 로리 앤더슨과 신 치엔 후앙간의 협업을 들 수 있다. 이들 콤비는 도판에 소개한 (www.stedelijk.nl/capricorn/anderson)라는 인터넷 작품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꼭두각시 여관(Puppet Motel)>이라는 유명한 멀티미디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런 협업은 사실상 미술관이나 전시 기획자 같은 공적인 채널을 통해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 기관들의 웹 아트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터넷 환경이 일반화된 지금, 넷 아트에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공 미술이라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유남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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