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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에 있어서 회화와 조각은 사진 기술의 발명 이전까지 기록성을 전제로 한 재현적 기능에 그 토대를 두고 있었다. 서구 예술 맥락에서의 소위 넓은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은 사진 기술의 발달로 인한 회화와 조각의 재현적 기능 상실에 따르는 일종의 자기 가치증명의 규명(self-definition) 의 역사이며, 추상미술과 오브제 미술, 설치의 방식 등은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된 미술개념의 확장인 셈이었다.

오브제(objet)

영어의 오브젝트(object)와 같은 뜻의 물체 또는 객체.
미술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제’와 대조적으로 사용된다.
현대회화, 특히 세잔 이후 큐비즘 등에서는 주제성을 배제하고 물체를 중히 여겼다.
그러나 오브제라는 말이 특수한 용어가 된 것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있어서이다. M.뒤샹이 1917년에 기성품 변기를 《샘(泉)》이라는 주제를 붙여 전람회에 출품한 것과 같이 다다이즘 시대에는 기성의 일용품이나 기계부품 등이 반예술형식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다시 자연물·수학적인 모형, 미개인의 숭배물 등의 물체를 비합리적인 또는 초(超)의식적인 인식의 대응물로서 취급하였다. 또 종래의 전통적인 조각형식을 타파한 구성작품(예를 들면 움직이는 조각 모빌 등)을 오브제라고 할 때가 있다.
미술에서의 오브제관(觀)은 흥미있는 미적 인식 문제를 투입하고 있으나, 오브제는 예술의 재료·형식·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외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수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점점 가속화되고 특히 전자매체에 의한 환경의 변화는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 함으로써 원본과 사본의 구별을 없애고, 전송과 저장의 방식으로 물리적 거리와 시간 개념을 완해 시켰으며, 변형과 변조를 통해 리얼리티 체계를 붕괴시켰다. 또한 이 디지털화는 통신 수단의 결정적 동기가 됨으로써 텍스트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직접 상호소통하게 함으로써 신문이나 책, 라디오 텔레비젼 등의 매체에 의해 일률적으로 소비되는 내용들을 개별화하여 대중사회를 해체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 특히 전통적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전자매체화된 환경의 조건 속에서 예술작품의 비물질화를 초래하게 됨으로써 미술의 개념 자체를 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젼의 시청은 유리관(브라운관)속의 수 백만 개의 인광이 전자빔에 의해 충돌되어지는 것을 보는 것인데, 인광의 밝기는 충돌하는 전자의 강도에 따라 달라지며, 적, 녹, 혹은 청색의 인광이 다양한 비율로 결합되어짐에 따라 완전한 칼라영상이 재현된다.


텔레비젼 시스템은 영상의 다양한 요소들을 빠르게 연속적으로 전송시키는 전자통로로, 시각의 지속성persistence of vision이라는 일종의 착시현상에 의해 영화에서처럼 이 요소들의 빠른 스케치를 완벽하게 움직이는 영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매 초 30개의 완전한 정지영상, 즉 프레임 frame을 반복적으로 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카메라는 영상을 한번에 한 줄씩 보며, TV수상기는 이 영상을 카메라가 기록하는 대로 화면의 맨 위 왼쪽 구석에서 시작하여 한번에 한 줄씩 아래로 움직여 맨 아래 오른쪽 구석에서 끝내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시각의 지속성이 매 초 30개의 완전한 텔레비젼 프레임의 디스플레이로 동작의 착각을 경험하도록 하는 원리이다.

 

TV는 본질적으로 전달을 위한 미디어이며, 대량전달 기능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 60년대를 전후한 보편적 상식이었으므로 TV나 비디오는 처음부터 그것을 둘러싼 전달 또는 소통의 형식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VTR에 의한 편집을 거친 비디오는 영화에 비해 화면이 작고 해상력이 떨어지지만 이 때문에 표현을 위한 미디어로서 더 적합하게 받아 들여졌다. 넓은 프레임과 롱 샷long shot 일수록 현장성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영화상식을 전제로 할 때 TV는 클로우즈 업이 더 잘 어울렸으며, 클로우즈 업은 몽타주의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컷팅cutting의 전형으로, 클로우즈 업된 단편들로 편집된 영상은 원래의 리얼리티를 충실히 재구성한다기 보다는, 화면 속에서만 독자적인 리얼리티(몽타쥬된)를 구성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여러각도에서 복수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적절히 전환함으로써 실제의 상황을 다양한 시점을 통해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야구 중계방송, 현장 뉴스보도 등)

 

비디오란 TV시스템 중에서 전자신호로 취급할 수 있는 영상을 의미하며, 오디오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TV 방송등의 대중전파매체는 송신이 수신을 지배하는 커뮤니케이션 권력관계의 전형으로 시작부터 국가나 대기업에 의해 보급되고 그 운영이 장악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동축케이블등 신호전송의 다양한 수단이 개발되고, 가정용 비디어 카메라와 VTR의 보급에 따라 소규모, 나아가 사회의 최소단위인 개인을 기본단위로 하는 소통이 가능해 짐에 따라 비디오는 처음부터 TV와의 차이점이라는 차이점에서 의식된, TV를 비판하는 미디어, 혹은 60년대 후반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배경위에서의 비디오 아트는 60년대 활발했던 전위적 실험예술 맥락의 주요한 매체로 부상하여, 전자 및 통신부문의 눈부신 기술적 전진에 힘입어 70년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이미 희심할 바 없는 새로운 대한 예술alternative art 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비디오 아트란 테이프 작업을 말하며, TV모니터는 이를 재생하여 보여주는 도구, 혹은 매체 이다. 따라서 촬영과 편집이라는 기술적 문제 이전의 예술적 가치에 초점이 맞추어지며, 테이프란 이 예술작품의 정보를 기록하는 매체인 것이다. 우리는 TV 모니터를 통해 보게 되지만 실은 테이프 기록 에 의해 재생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며, 이 전자파의 충격에 의해 재생되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적 이미지에 담긴 메시지나 메타포를 읽게 된다.

한편 3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비디오 아트는 1965년 소니사가 포타팩portapak(휴대용 녹화기)을 판매한 첫날 백남준이 그 기기를 구입하여 성 바오르6세의 뉴욕방문 기념행진을 촬영하고, 카페 아 고고Cafe a GoGo에서 비디오 테이프 예술을 선 보인 것을 시작으로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지고 있다.

 

그 1세대는 주로 정지화면과 기계장치를 통해 조정, 변형된 화면을 보여주는데, 60년대 후반에 들어 소형 포타팩을 이용하거나 독자적인 비디오 신시사이저synthesizer를 개발하는 예술가들이 나타나서 비디오 기술에 의한 예술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세대는 비디오 또는 하이테크hightech 장치에 의존해 사물의 본질과 환경을 부각시킨 실험적인 예술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비토 아콘치Vito Acconci, 조안 조나스Joan Jonas, 피터 캠퍼스Peter Campus, 다라 번바움Dara birnbaum 등은 비디오를 기존의 자신들의 작업과 결합하여 비디오 테이프 Videotapes, 비디오 조각 Video Sculpture, 비디오 설치Video installation 작업에 주력하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예술장르로서 자리잡게 된다.
3세대인 빌 비올라와 게리 힐은 비디오 아트의 시간성의 개념('움직임'과 '전자적 흐름')과 독특한 미학을 탐구한다. 한편, 컴퓨터와 정보 테크놀러지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매체에 의한 새로운 표현의 장이 가능해 졌으며, 비디오 아트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른바 가상공간Cyber Space에서의 가상현실 체험, 즉 Virtual Reality/VT 혹은 인공현실 Artifical Reality/AR와 컴퓨터 통신장비의 지원을 받아 서로 다른 공간에서의 동시적 communication을 시도하는 Network Art 등이 그것이다. 이 Network Art는 1984년 벽두에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라는 작품에 의해 전세계의 위성망을 통해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 있다.

 

가상공간이란 용어는 1984년 SF 작가 William Gibson 'Neuromancer'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상환경과 시뮬레이션 세계에 의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실험실이자 우리의 현실감각 자체를 시험하는 도구인 것으로, 미디어를 통해 인간 상호간의 소통을 행하는 공간을 말한다.
텔레비젼은 전파의 광역성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대량소통의 위력으로 모든 사람을 시청자로 삼는 일방통행적인 소통의 구조를 가진 비자연적인 형식을 갖는다. 이 가상공간을 통한 상호작용적 소통은 TV라는 '하늘로부터 낙하산처럼 쏟아지는 고주파(High Frequency, 백남준)'를 통하여 시청하는 '잠재적인 수신(용)자에게 개인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소통이 가능해진 현재화(現在化)된 수신자'로 그 소통의 구조가 변화되는 과정의 차이를 의미한다.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은 예술작품이 작가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이 붕괴되고, 작품의 제작, 소통, 향유의 과정에 외부적 요소나 관객의 퍼포먼스가 개입되어 이루어 지는 것이며, 옵티컬 아트(Soto의 작업 등) 작품에서와 같이 작품이 그 구조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는 매커니즘과 인간의 시각적 매커니즘의 대응에 의한 것, 가변적 상태의 작품을 관객이 자유로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경우, 작품이 변화에 반응하는 경우, 특히 이 경우에 있어 칼더A. Calder의 모빌처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경우와 작품에 내장된 센서가 외부의 정보를 읽고 이를 다른 출력에 반영하는 방식으로서의 전자적인 반응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인간의 퍼포먼스에 반응하도록 고안된 가상의 환경이 있어서 앞의 전자적 반응이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현실을 초월한 정보공간, 즉 가상공간Cyber Space에서 이루어 진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혹은 인공현실Artifical Reality, AR은 인간과 기계의 상호관계Man-Machine Interface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 대화형의 소통을 통해 인간에게 가상의 reality를 제공하는 공간, 혹은 그 장치로 가상공간의 한 부분집합을 말한다.


실세계Actual Reality와 VR의 관계는 수학에 있어서의 실수와 허수를 사용함으로써, 실수의 범위에서 풀리지 않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풀릴 수 있는 것 처럼, 세계가 무제한으로 증식될 수 있는 VR은 현실세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탐구하는 장이 되고 있다. Artificial Lift의 연구공간은 수학의 허수나 비유클리트 기하학과 같은 차원이며, Virtual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기능면에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VR이란 인간의 외계인식을 담당하는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지각기관에 대해 컴퓨터에 의해 합성된 정보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주위에 가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계장치러서의 미디어 시스템 으로 하나의 환경이자 상호작용적인 관계인 것이며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현실감, 즉 AR의 기술인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 테크놀러지 아트의 최근의 양상은 과학적 진보에 의해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의 체험을 통한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제시하자는데 모아지고 있다. 이것은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보소통의 양식 이며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예술의 존재 방식과 그 정체성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이슈이자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너무너무 유명한 인용, W. 벤야민이 사진술의 발견 이후의 시대를 '기계적인 복제기술의 시대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ti'라고 정의하고 '아우라Aura의 상실'을 지적한 바와 관련하여 미디어 테크놀로지 예술의 특성이 회화나 조각과 같은 기존의 예술영역들과 이미 태생적 차이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예술이 지향하는 일탈의 욕망을 과학이론과 기술에 의해 성취해 가고자 하는 구체적인 시도이자 실험으로 상호소통이라는 핵심적인 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가의 천재적 재능에 의해 구축된 예술성을 일방적으로 수해받던 관람자들이 소통의 대상이자 주체이며, 그들의 참여없이 성사될 수 없는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미디어 테크놀러지 예술은 그 특성 상 새로운 정보와 기술, 정보가 총체적으로 결합되어야 가능해 진다. 예술가 개인의 지식이나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로 그 사회적 기능은 강화되며, 때문에 이러한 예술 작품의 제작과 연구가 가능해지고 그 수용이 가능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비디오 아트를 위시한 미디어 테크놀러지 아트는 급속한 사회 환경변화로 인해 새로운 개념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예술매체로 부상되어,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과학적 테크놀로지에 기초하고 있는 이 예술매체는 단지 소극적 의미에서의 또 하나의 예술영역을 개척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예술의 고유한 가치로 받아들여지던 많은 장치나 요소들을 거침없이 걷어치우며 예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제시해가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문제라든가 '정보', '감각', '소통'의 문제와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양상은 앞으로 더더욱 빠른 속도로 강화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을 속속 재능있고 감각적인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작품 속에 반영되거나 거꾸러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방향성이 제시되어 오기도 했다.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실용으로서의 기술 사이에는 지속적으로 그 간격이 벌어지고 이것으로 인해 미래의 과학문명은 불구적 형태로 기형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예술과 과학은 더 이상 떼어 놓은 수 없는 관계에 놓여지며, 때론 상보적으로 때론 대항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 카셀 도큐멘타, 베니스 비엔날레, 리용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등등에 대규모 국제미술행사에 비디오 아트를 위시한 미디어 테크날로지 아트가 대거 등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이후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예술가들이 급격히 팽창하여(너도 나도 캠코더로 찍고, 편집하여 모니터와 빔 프로젝터 등을 이용해 보여주는 방식) 불과 몇 년만에 이미 보편적인 매체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제 비디오 아트는 더 이상 낯선 미술이 아니며, 관주도의 대규모 전시에서, 그리고 소규모 미술관이나 화랑들, 어디서나 쉽게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속에서도 앞서 언급한 미디어 테크놀로지 아트의 핵심적인 이슈나 쟁점에 접근하고 있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며, 기술적으로도 매우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현대미술 작품들의 개념이나 어법에는 무관심하면서 유명한 미술작품들의 표면적인 양태의 모방과 추종에 적극적인 우리 미술의 풍토는 다원주의를 외치는 제1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우리가 왜 다원주의에 동참할 수 없는, 제3세게 주변국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과거에는 도양의 전통 사상이나 관념등에 기대어 이념적인 한국현대미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미디어 테크놀로지 아트 분야에서의 이론적, 기술적, 문화적, 과학적 열등성은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화려한 전람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문화적 열등성을 강조하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지난 1998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사진의 시각적 확장전과 올해의 광주 비엔날레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며,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서울시가 올해 9월에 열기 위해 준비하는 미디어시티 2000에서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과학은 예술이라는 인문적 맥락과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미디어 테크놀러지 아트가 활발히 연구되고 발표되는 서구나 일본에 비해 과학적, 기술적, 문화적 환경조건이 상대적으로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흉내내기는 개념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다 조악하고 유치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조건들이 우리 나라의 매체예술가들로 하여금 비디오테이프 작업 보다는 설치된 상황을 제시하려 한다든가, 혹은 개념성과 거리가 먼 시각적 효과에 치중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매체예술의 특성상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기초적인 원리와 체계를 충실하게 탐구하고 다양한 실험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며,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대안적 예술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현대미술은 막대한 양적 팽창과 내용적 저열함을 보여 온 매체예술 작품들에 대한 어떤 비판적 문제제기나 비평, 논의가 거의 전무했으며, 작가들이건 비평가들이건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광범위한 담론에 단편적인 지식의 소개와 철학이 부재한 경박한 이해에 근거하는 패션적인 트랜드 스타일을 구사하는 미술들의 현상으로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금세기 최고의 비평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사망하기 몇 년전 아시아의 많은 예술가들이 20세기 내내 현대미술 작업을 선보이며 동참하려 애써 왔으나 핵심적인 쟁점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 발언은 다분히 소위 제1세계 중심의 문화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 언급이었으나 어떤 측면에서 현대미술을 주도하고 있는 그들의 핵심적인 원리나 이슈, 혹은 쟁점에 깊숙히 접근해 오지 못한 아시아 현대미술의 한계를 환기시키는 지적이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 나라는 현대미술이 대중들 속에서 꽃피고 향유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소위 현대미술의 국제적 흐름을 표면적으로 수용하고 답습해 가기 급급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작품은 원형적으로 현대미술의 표면을 끊임없이 닮아가려 애쓰고 있으나, 정작 개념적으로는 여전히 그 핵심적인 컨텍스트에 접근하고 있지 못하다. 소위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말이 바로 제1세계 중심적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우리 문화의 아이덴티티가 그 다원주의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가 우리 나라 미술계에서는 문화적 다국적성에 근거 하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이 공존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식이기 때문이다. 소위 남대문 식의 가짜 브랜드로 가득찬 '세계 현대미술 문화의 슈퍼마켓화'가 목표인 것처럼 말이다.

 

현대라는 말은 다분히 의식적인 것이다. 다시말해 시간의 평면적 구분, 혹은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시대적 구분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과거와 구별하여 사용되었을 의미를 갖는, 그래서 자신이 속한 시대를 그 이전의 그것과 애써 구분하여 두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현대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며, 항상 동시대인들의 첨예한 이슈와 쟁점을 표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대성은 파란많은 근현대사 100여년의 역사적 질곡위에 극히 복잡하고 다중적인, 그래서 매우 혼란스럽고 숨가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휩쓸려 급격한 지적,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역사적 비판과 자각의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살아오면서 각박한 현실속의 절박한 생존논리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 이념 사이에서 극도의 가치 혼란에 빠져버릴 수 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의 의식은 문화의 이중적, 혹은 다중적 양태를 생산하고, '현대성'은 자기비판과 규정의 과정없이 편의적으로 변용되어 필요에 따라 어떤 패션적 스타일과 담론을 범람시키면서 소모해 가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의 경우 그 양상은 더욱 심각한 것이어서 급기야 참다운 현대의 예술과 예술가들을 밖으로 내모는 상황을 내고 있다. 官주도의 대규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고 많은 예산이 투자되고 있지만, 이 대부분의 행사들은 속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당치도 않은 내용들을 담고 있더, 도대체 무엇이 이 시대의 이슈이며 쟁점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들고, 때문에 당연히 논의와 쟁점도 부재에 빠져 버린다.
모더니즘 의식에 관한 광범위한 반성과 해체가 바로 그 모더니즘 문화를 구축한 구미의 사상가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서구의 몰락과 아시아의 미래에 관한 밝은 전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정보의 힘에 의해 다시 새롭게 태어나 세계의 권력구조를 재편하게 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 나아갈 방향은 생각처럼 선택의 폭이 크지 않다. 세계는 무한경쟁 사회의 본격적인 막을 열고 있고, 각 분야의 투자와 대응은 생존의 조건을 담보로 한 것이 된다. 이제 문화와 예술도 더 이상 순진의 껍질을 유지할 수 없으며, 오히려 각 분야의 절묘하게 연동된 문화정치학적 정책의 개발과 운영이라는 고도의 전략적 대응이 절실해 질 것이다.


당연히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활동무대에 관한 시간적,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넘어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개별적으로 펼쳐 나아가게 될 것이므로 변화하는 지적, 물리적 환경은 필연적으로 피해갈 수 없이 맞닥뜨려가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넘치는 충격적인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회화와 조각 등 전통적 양식의 예술들이 왜 그려지고, 왜 깍아내져야 하는 지 다시금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새롭게 규명해야만 할 위기에 처해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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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신라대학교 예술연구소 학술세미나 오상길 작가의 주제 발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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