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프랙탈 이야기들

작가와 함께한 프랙탈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2009.10.31 00:04

프랙탈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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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프랙탈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중심으로 프랙탈아트 작품을 소개했다면 이번 글에는 좀더 프랙탈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프랙탈이 수학적인 요소에서 출발하였으나, 최근 화려한 색과 현란한 모양으로 뭇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랙탈을 이야기 하다 보면 자주 테셀레이션과 비교 질문을 받곤 한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유리창문의 창살 및 욕실이나 마루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과 같이 틈이나 교차점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도형으로 덮는 형태(모양)를 말한다. 대표적인 테셀레이션 작가로는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이다. 에셔는 수학적 소재라 할 수 있는 테셀레이션을 예술적 경지로 발전시켰다. 아래의 테셀레이션 그림이나(좌) 혹은 에셔의 작품을 무한대로 확대(Zoom In) 하다 보면 원래의 이미지나 도형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자기 유사성을 가진 프랙탈(아래 작품 오른쪽)과는 다른 것이다. 프랙탈은 아래 프랙탈작품(우)에서 보듯이 무한히 확대해도 작은 소용돌이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이미지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2-1.jpg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현상들을 보곤 한다.
주위에서 느끼는 이런 현상들 중에서 불규칙 적이고 무질서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 해안선, 구름, 산, 태풍, 돌개바람, 담배연기 등등 이런 것들은 자연현상 속에서 무질서한 현상 및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혼돈과 무질서는 인간의 지식으로 정의를 내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70년대부터 활발해진 이런 혼돈에 관한 연구가 Chaos 및 Fractal등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일까? IBM의 토머스 왓슨(Thomas J. Watson)연구센터의 만델브로트(BenoitMandelbrot)는 프랙탈 이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으며, Fractal(프랙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처음 그의 논문이 네이쳐지에 실렸을 때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다 한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프랙탈이 뜨거운 감자가 되자 그때서야 과학자들이 부랴부랴 만델브로트의 논문을 뒤지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논문(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에서 심오한 의문을 제기한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될까?" 라는 것인데 이 넌센스 같은 질문은 그 후 많은 논문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반지름 1인 원의 원주의 길이를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원주 공식(2Πr)을 적용하면 된다.
Π(파이) = 3.14159.... 이므로 2Πr는 대략 6.28이 된다.
영국의 해안선을 알기 위해서 같은 방법으로 아래의 그림과 같이 적용 할 수 있다.

 

1.gif

 

즉, 곡선의 길이를 잘게 쪼갠 직선의 길이의 합으로 가정하여 계산하는 방법은 측량기사가 지형도를 만들 때 사용하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절차다. 아래의 표를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won.gif 

 

 

선을 많이 쪼갤수록 2Πr(6.28)에 가까워 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델브로트가 제시안 영국의 해안선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자.
프랙탈의 창시자는 IBM의 토머스 왓슨(Thomas J. Watson)연구센터의 만델브로트(Benoit Mandelbrot)이다. 그는 Fractal(프랙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논문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에서 프랙탈 인식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내놓았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은 언뜻 보기에는 넌센스 같지만, 이 단순한 질문은 실로 심오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면 만델브로트가 제시한 영국의 해안선은 얼마나 될까?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해안선을 200마일 단위와 25마일 단위로 잰 것이다. 25마일 단위로 재면 200마일로 단위로 잰 것에 비해서 측정된 해안선의 길이가 길어진다. 그 이유는 해안선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복잡하기 때문이다. 만일 더 작은 단위로 해안선을 재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1cm단위로 잰다면 어떨까? 아니, 원자 한 개 길이만한 자로 잰다면 어떨까?
2-2.jpg 
만일 1cm 길이의 측정단위를 사용하여 전 해안선을 기다시피 하며 세밀하게 측정 할 경우, 모든 해안가의 짧은 곡선, 해안 바위들의 굴곡 하나하나가 합산 되어 해안선 측정 값은 엄청나게 증가되어 천문학적인 수치가 나올 것이다.

3.gif

 

측정단위에 의해 합산된 곡선의 길이가 단위를 작게 할수록 무작위로 커진다면 그 곡선은 프랙탈 곡선이라고 한다. 따라서 영국의 해안선은 프랙탈이다. 이유는 영국의 해안선은 크고 작은 수많은 만, 내해, 작은 강, 복잡한 바위투성이들로 구성되어 매우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더욱 짧은 측정단위를 사용하면 구부러진 지형들에 깔끔하게 맞출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전체 길이는 증가하게 될 것이다. 원 모양의 곡선과 영국의 해안선과 같은 곡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은 곧 고전적인 기하 형태와 프랙탈 기하 형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에 첫째 명제가 제기된다. 영국의 해안선은 프랙털이다. 그래서 그 길이를 측정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프랙탈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것이다.

      4-1.gif

  

영국의 해안선이 프랙탈이라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주위의 다른 곳에서도 프랙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구름, 산, 나무, 심지어 사람의 뇌의 주름 등에도 프랙탈을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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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23:30

프랙탈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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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프랙탈을 접하게 것은 1992~3년인듯 싶다. 프랙탈은 처음 수학에서 출발했지만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환성적인 색과 화려한 모양의 프랙탈 작품이 먼저였다.

프랙탈이란? 물체를 아무리 크게 확대를 하거나 또는 무한대로 축소하여 현미경으로 들여다 정도로 세분한다 할지라도 본래 물체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프랙탈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양치류이다. 양치류의 잎들은 각각 전체의 축소형이다. , 가까이에서 보는 형태가 멀리서 보이는 형태와 같다. 이는 프랙탈 프랙탈의 특성인 자기유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먹는 브로컬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아래 왼쪽  사진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을 있는 양치류이다. 아래 사진과 같이 멀리서 보이는 전체의 이미지, 삼각형 형태가 잎에서도 원래 모양과 유사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음을 발견 있다 

1-1.jpg

번개.jpg

번개의 전파는 습도, 기온 및 기타 그 지역의 다양한 환경조건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번개의 경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옆의 사진을 통해 쉽게 번개 치는 보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경로는 직선이 아니고 꾸불꾸불 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번개의 모습은 비 규칙적으로 진행하지만 자기와 유사한 가지치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모습은 불규칙하지만 전체모양은 가지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나무.jpg또, 멀리서 바라보는 나무 모습은 옆 그림과 같이 나무 기둥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좀더 가까이 나무를 들여다보면 그 가지는 다시 더 작은 가지로 뻗어가고 그 가지는 다시 더 작은 가지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유사성을 통한 전형적인 프랙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듯 프랙탈은 끝없는 반복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세분화된 모양이 원래의 형태와 동일한 모양의 자기유사성을 갖게 됨을 말한다. 최근 이런 이론을 통하여 프랙탈이 “프랙탈 아트”라는 예술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이런 프랙탈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사람을 프랙탈 아티스트라고 한다.
필자가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이번 작품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을 소재로 한 프랙탈 작품들이다.

 

 

 

 

줄리아집합.jpg

옆의 푸른색 그림은 줄리아 집합(Julia set)이라고 하는 유명한 프랙탈이다.
이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반복되는 소용돌이 형상 내부에 다른 소용돌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그림을 가까이서 들여다 본다면 프린터가 인쇄할 수 있는 한계까지 더욱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무한히 반복되는 형상을 유한한 공간상에 축소해 놓은 것일 뿐 전부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정의를 하자면, 프랙탈은 스스로를 계속 축소 복제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반복 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세분화된 모양은 원래의 형태와 동일한 자기 유사성을 갖는다. 

 

 

 

 

 

-계속- 

 

  

 

-참고-

 

프랙탈이란

프랑스의 수학자인 만델브로트Mandelbrot는 1967년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선의 총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넌센스같은 질문은 매우 심오하고 오묘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글에서 만델브로트는 영국의 해안선의 길이는 어떤 자로 재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Cm 단위의 자로 재었을때와 1m 단위의 자로 재었을때는 둘래의 길이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된다.

70년대 중반 프랙탈이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여러 과학자들이 만델브로트의 논문을 실렸던 '사이언스'지를 뒤적거리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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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00:24

프랙탈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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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 나타나는 프랙탈들..

앞에서 만델브로트가 제시안 영국의 해안선이 프랙탈이라면 우리 주위의 다른곳에서도 프랙탈을 찾을 수 있까? 해답은 자명하다.. 프랙탈은 우리 주의의 모든곳에서 찾을 수있다. 앞에서 정의-1 과 같이 곡선의 길이가 단위를 작게 할수록 무작위로 커진다면 그것은 프랙탈이라고 정의했다.(프랙탈 이야기-2 참조)

 

필자가 앞 글에서 언급했지만 프랙탈 특징을 이야기 하다 보면 항상 자기유사성(Self-similar)에 관하여 논하게 된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자기 유사한 물체는 프랙탈이라고 하지만, 모든 프랙탈에 자기유사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프랙탈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불규칙성에 의해 정의되지만, 이러한 불규칙성이 꼭 동일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5-1.gif

5.jpg 

위의 사진 왼쪽은 달 표면에 남긴 발자국이라는 유명한 사진이다.
발자국 주변은 자갈이나 돌들로 인해 울퉁불퉁하고 불규칙적으로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달에서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인데, 아마 많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사진 또한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나타나는 유명한 사진중의 하나다. 자 그럼 두 사진을 보자. 지구를 바라보는 사진 속 달의 모습과 발자국이 찍힌 달 표면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위의 왼쪽사진에서 발자국만 없다면 달의 표면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달도 프랙탈이다.

우리는 이전 글에서 프랙탈의 작은 부분이 전체와 유사한 것을 프랙탈의 자기유사성이라 했다. 그러나, 달표면을 비교한 두 장의 사진에서 관찰했듯이 모두 프랙탈의 불규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프랙탈 차원은 멀리서 본 달 표면보다 가까이서 본 발자국 사진에서 더 높게 보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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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00:29

프랙탈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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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주위에서 프랙탈을 찾자보자..

 

[산]

산도 프랙탈이다.

멀리 보이는 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들을 보노라면.. 모두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험준한산이거나 아님은 그렇지 않거나 하는 정도지.. 모양은 다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바로 산도 프랙탈이다.

 

정상에 올라서서 바로 앞에 보이는 언덕까지 2~3시간정도면 갈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가보면 험준한 개곡과 협곡들을 지나다보면 하루종일 걸릴수도 있다. 길은 곧아지고 기차나 비행기 항로등은 더욱 짧은 거리를 질주하고.. 옛날과 같이 굽이굽이 자연의 프랙탈을 밟아가던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현대인들은 더욱 멀리 벗어나고 있는 지금... 산을 오르는 재미는 프랙탈 차원의 면들을 밟아가므로서 부분적으로나마 태초의 혼돈과 자연이 주는 프랙탈을 본능으로 인지하여, 자연으로부터 온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재미가 아닌가? 한가지 생각해야될것이다. 프랙탈의 특징을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자기유사성(Self-similar)에 관하여 논한다. 본인도 앞의 프랙탈이야기-1에서 언급했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유사한 물체는 프랙탈이라고 하지만, 모든 프랙탈이 자기유사하지는 않음을 알아야한다. 프랙탈은 모든 범위에 존재하는 불규칙성에 의해 정의되지만, 이러한 불규칙성이 꼭 동일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구름]

구름도 산과같이 프랙털의 신비한 예가 될 수 있다.
비행기안 창측에 앉아서 구름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는 프랙탈을 연구하는 일 일것이다. 어떻게 구름도 프랙탈이 될 수 있을까? 구름도 앞에서 언급한 산과 같이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프랙탈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호수의 표면]

호수의 대부분의 표면은 잔잔하다.
바람부는 날에는 잔잔한 부분이 작아지고 고요한 날엔 커진다. 최근까지 호수면에 일어난 잔잔한 파문은 일정한 형태로 퍼져나가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유체의 복잡한 운동의 하나인 와류(Turbulence)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바람부는 날 물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해 봄으로써 파문의 형태가 균일한 것이 아님을 찾아 낼 수 있다. 호수의 표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볼때 매끈한 면과 거친 면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지극히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잔잔함과 거침이 혼합되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프랙탈임을 알 수 있다.

 

[날씨]
만일 나이아가라 폭포위에서 하나의 작은 나무잎을 폭포에 띄운다면 몇 분 후 폭포 아래로 떨어진 잎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물음에 아무리 고도의 과학으로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예측을 한다손 치더라도 정확한 답을 예측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날씨가 바로 그렇다. 강력하고 복잡한 슈퍼컴퓨터로 일기예보을 예측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이것은 컴퓨터의 오작동도 아니고, 수학적 알고리즘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날씨에 관계하는 역학적인 구도가 혼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앞에서 언급한 폭포 밑으로 떨어진 작은 나뭇잎의 위치를 예즉하는 것과도 같다. 날씨는 동역학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출렁거리는 호수 위의 고요한 파문은 지구뒷편으로 전달하여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일이다. 즉 카오스 이론의 모태가된 유명한 나비효과(베이징에서 나비 한마리가 날개를 퍼덕임으로써 뉴욕에 폭풍우가 몰아칠 수 있다) 이다.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일기예보를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전선을 동반하고 동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거대한 저기압대들이나 걸프만의 허리케인은 항시 존재한다. 일기에 관한 위성사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들 중 하나다. 이 위성사진들은 혼돈(Chaos) 일기 역학의 그래픽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프랙탈에 이르는 또다른 경로 혼돈에 관하여 논하게 됬다.

정의 :
동역학계(Dynamic System)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의 집합이다. 계통 내부의 초기 조건상의 변화가 후에 계통상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동역하계는 혼돈이라 한다.

프랙탈의 특징들
       - 분리된 차원(Fractional Dimension)

       - 모든 영역에서의 복잡한 구조(Complex Structure at all Scales)

       - 무한정한 가지치기(Infinite Branching) - 자기유사성(Self-Similarity)

       - 혼돈 역학(Chaotic Dynamics)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모든 프랙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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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2.jpg

 

2009년 과학동아 11월호

IMG_0126.jpg   IMG_0152.jpg

 

 

 

 

 

박보석아티스트의 프랙탈 아트 화보 소개 (아름다운 무한 반복 프랙탈 아트)

http://www.dongascience.com/ds/

 

science1.gif

 

 

 

과학동화 11월호 26p~33p

 

IMG_0136.jpg IMG_0144.jpg  IMG_0145.jpg   IMG_014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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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프리우스 2009.11.22 13:59

    엇, 과학동아에서 프랙탈 아트에 대해서 처음 접했었는데 바로 그 분이셨군요!!

    오오오 역시 세상은 참 좁은 것 같습니다 :D

  • profile
    Mond 2009.11.22 21:12

    안녕하세요? 세상이 좁죠?

    아직 프랙탈 아트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않지만... 많은 디지털 아티스트들이 꾸준한 작업과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찾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주 뵈여~~~

    emoticon

  • ?
    오드리 2010.07.12 16:21

    와아~ 과학동아를 보고 찾아온 독자도 있군요!!

    역시 과동에 화보로 나오면 모두 대스타가 됩니다~ 움화화화~

    저도 사실 기사 만들면서 프랙탈 세계에 빠지게 됐어요!

    모두 박보석 교수님의 보석 같은 작품들 덕분이죠~~ 앞으로도 자쥬 찾아올게용

  • profile
    Mond 2010.07.12 16:34

    이기자님 덕분이죠.. 대스타~ 가 된것은 움화화화~

    암튼.. 반갑습니다. 이렇게 또 뵙게 되어~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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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44301_mobilos.jpg

 

 img_4429_mobilos.jpg

 

 img_4431_mobilos.jpg

 

 img_4433_mobilos.jpg

 

2008년 컴아트( computer Arts) 3월호 프랙탈아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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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tool_fractal1.jpg

 

cgtool_fractal4.jpg

 

 cgtool_fractal2.jpg

 

 cgtool_fractal3.jpg

 

 

디자인 저널 DESIGN JOURNAL (월간) 3월호

 

목차 
· 서스테인어블 디자인
환경을 예술로!_ 서스테인어블 디자인 [3], 공연예술편

· 공공디자인
녹색성장도시 에코피아, 가평_ 혁신사례 [3] 가평군 편

· 기획연재 1
노승완의 디자인 부도덕 강좌
전통을 현대화하는 문화중심 리더_ 광주요 그룹 조태권 회장
스스로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_ 최중호
서정적인 퀼트디자이너_ 임경아
유비쿼터스 도시는 녹색인가?_ 송준화
기계감성의 극치, 프랙탈아트_ 박보석
굿굿굿, 좋은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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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 크리스마스트리를 출품하여 제5회 경향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했네요~^^

미술대전에서 디지털아트로 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미술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림그리기(?) 만을 연상이되곤 하지만..

그래도 컴퓨터로 만든 작품이 당선됬다는것에 고무적이네요^^ 미술대전에 몇번 출품했지만... 수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시대가 조금 변화된듯하네요~

디지털아트도 한국 예술계에서 확실하게 자리잡는 그날까지..~~ ^^

 

 

크리스마스트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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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만델브로트가 IBM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중 자신의 논문 제목을 생각하다가 라틴어의 Fractus라는 낱말을 발견하여 FRACTAL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프랙탈 기하학이 정수가 아닌 분수(Fractional)차원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FRACTAL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프랙탈의 속성은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순환성Recur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들어 있을것 만 같은 만델브로트 집합이나 줄리아 집합 뒤에는 z = z2 + c이라는 간단한 수식에서 출발한다.

프랙탈은 컴퓨터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알려지게 되다.
비록 몇 줄 되지 않는 프로그램이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물리적, 기하학적, 철학적 내용은 앞으로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혼돈이란 뜻을 가진 카오스chaos는 자연현상에서의 혼돈과 무질서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은 단순한 수학적, 물리학적 학문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 쉽게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다양한 학문에 적용시켜 볼 만큼 폭이 넓은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카오스 이론이 어떠한 것이길래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다루고 있는지 궁금지 않습니까?

 

 

 

 caos1.gif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라는 구절을 생각하며 그렸음직한 옆의 작품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 있는 카오스 이론을 잘 설명 해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이 복잡한 유기적 형태로 변하고 있는 그림의 내용은 저 멀리 오랜 옛날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 사상과 폴라톤의 윤회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양의 혼돈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장자(莊子)의 응제왕(應帝王)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남쪽 바다의 왕과 북쪽 바다의 왕이 있었다. 어느날 두 왕은 혼돈(混沌)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이 두 왕을 잘 대접해 주었다.
두 왕은 혼돈의 친절에 감명 받아 감사의 선물을 주기로 했다.
두 왕은 의논하기로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을 가지고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혼돈에만 그게 없음을 생각하여 혼돈에게 인간들처럼 7개의 구멍을 뚫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한 개씩의 구멍을 뚫어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7일째 구멍을 뚫어 주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南海之帝爲 .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沌.
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之鑿.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莊子》〈內篇〉, "應帝王"

 

 

 

 

 

장자 (莊子/BC 369~BC 28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서양의 혼돈

기원전 8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신통기Theogoneia에서 질서 정연한 우주가 생기기 이전에 큰 혼돈상태인 카오스(khaos, 그리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카오스는 '망망한 허공'이란 뜻으로 쓰여 졌습니다.
카오스로부터 에레보스(어둠)와 뉴크스(밤), 가이아(대지), 타르타로스(저승)이 태어났으며 이들로 부터 아이텔(하늘의 빛, 정기)과 헤메라(땅의 빛, 낮)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질서의 세계인 코스모스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있어 혼돈은 비밀에 쌓인 어떤 것으로서, 질서 있는 세계에 앞서 있는 우주의 최초 원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자연의 세계는 선형적인 사고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배경에는 분명히 전통적인 환원주의적 사고 방법만으로는 인식 불가능한 어떤 숨겨진 영역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오늘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한 이래 고전 물리학적인 사유방법이 어떤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의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혼돈의 문제가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제기된 것은 새로운 과학방법을 요구하는 현대의 시대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서양의 혼돈사상 인식의 비교

동양의 혼돈은 분석적 지식에 대비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의미로 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이며 이 우주의 질서라고 여겼습니다.
장자의 응제왕편에서 서술한 것 처럼 혼돈과 애매성은 그 자체로 내버려둬야지 그곳에 인위적인 작위성을 가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서양의 혼돈은 코스모스의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들의 철학과 과학은 질서와 합리성 위에 이루어 졌습니다.
질서와 법칙에 대한 연구는 서양의 과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오늘날 동양보다 서양의 과학이 발전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서양의 혼돈에 대한 공통점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카오스란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무질서의 정반대인 질서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카오스는 무한한 질서를 내포하고 있으며, 풍부한 새로운 구조를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자기조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속에 무한한 창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혼돈과 질서의 반복적인 패턴이 프랙탈이며 그 속에는 삼라만상이 꿈틀대고 있으니

 

 

출처 : fract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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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온라인화 되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사회는 한편으로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현실이다. 미술의 패러다임 자체도 그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다시 재편될 것인가. 최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넷 아트의 실례들을 통해 네트워크 상에서 전개되는 아트 프로젝트들의 실험과 성과를 점검한다. 필자는 넷 아트에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공미술을 발견하고 있다.

net1.jpg ▲ 데이빗 블레어 <왁스웹> (jefferson.village.virginia.edu/wax) 홈페이지 데이빗 블레어의 유명한 실험영화 <왁스 혹은 꿀벌들 가운데서 텔레비전의 발견>의 웹 버전. 왁스웹은 처음 머드(MUD)의 변종인 무(MOO) 형식으로 서비스되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는 서사 형식의 선구적 사례로 주목을 끌었고, 최근에는 다시 VRML을 이용한 3D 버전과 CD-ROM 버전을 선보이는 등 꾸준한 업그레이드를 진행해 오고 있다.

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20세기 말의 컴퓨터와 인터넷은 몇 가지 점에서 초창기의 사진이나 영화를 연상시킨다. 새로운 기술의 위력에 대한 탄성과 열광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통적 예술에 대한 불안과 위기의식이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적 신기함을 넘어서지 못하는 예술적 깊이의 박약함에 대한 회의적 시선 또한 만만치 않다.

컴퓨터 테크놀러지를 이용한 미술 창작의 역사는, 초창기 컴퓨터 그래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30여 년에 이르고 국내의 경우도 15년 가까이 된다. 이제는 컴퓨터 테크놀러지가 창작과정의 곳곳에 침투해 컴퓨터 아트· 인터액티브 아트· 미디어 아트· VR아트· 디지털 아트· 알고리즘 아트(algorithmic art)· 넷 아트(웹 아트) 등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외연을 지니게 되었다. 그중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으면서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극적인 전환과 맞물려 특별히 주목받는 바로 넷 아트다.

미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인터넷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될 수 있다. 하나는 인터넷을 일종의 소통의 채널로서 활용하는 것으로, 기존에 제작된 작품의 사진이나 정보를 ‘가상 갤러리’ 형태로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작품을 실물이 아닌 스캐닝된 이미지로 본다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또 대다수의 예들이 전시 팸플릿 수준을 넘지 않는 진부한 형식이긴 하지만, 미디어로서의 인터넷의 폭넓은 잠재력을 고려할 때 결코 간단히 넘겨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일차로 이 가상 갤러리는 전시공간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외국인을 포함하여 전시장을 찾을 수 없는 많은 관객들에게 작품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영화의 예를 들자면, 극장을 확보하기 어려운 소규모 독립영화들에게 머지않아 인터넷을 통한 ‘비디오 스트리밍’이 유력한 배급 전략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화와 미술 모두 인터넷을 통한 전시나 배급이 관객의 폭을 넓힌다는 데에 의미가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특성을 이용하여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작가와 관객간의 유의미한 의사소통(예술적 주장, 인터뷰, 논쟁, 관객의 코멘트, 온라인 설문조사 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터넷을 단순한 전시공간의 확장이나 프로모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더 적극적인 소통의 전략을 고민한다고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처음부터 인터넷을 겨냥한’ 창작, 곧 넷 아트로 모이게 된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넷 아트는 일반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측면이 중요하고, 전통적인 작품 개념보다는 좀더 광의의 ‘창작적 실천’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국 넷 아트에서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개입을 고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흔히 웹 아트란 말에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은 추진 배경의 공공적 측면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창작이 지닌 활동이나 프로세스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도 있다.

net2.jpg ▲ 푸른 사람들 이중재씨를 중심으로 웹 아트에 관심을 가진 젊은 작가 몇 명이 함께 만든 '푸른 사람들'의 웹 사이트.
국내의 경우 아직까지 본격적인 넷 아트의 개념으로 볼 만한 작품이나 활동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사례라 할 만한 것이 웹진의 형식을 취하는 블라인드 사운드이다.

주로 미술 및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작가들의 웹 기반 작품들을 소개하는 이 사이트는, 소품 위주이긴 하지만 매우 완성도 높고 창의적인 실험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아마도 쇽웨이브나 플래시를 다루는 기술로는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넷 아트의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기본적으로 인터액티브 디자인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네트워크를 통해 밖으로 연결되는 프로세스보다는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의 결과들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치중하는(여전히 닫힌 작품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전략에 다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품이 아닌 전체로서의 블라인드 사운드와 그 제작 주체로서의 퍼스널 코포레이션스는, <맥 지저스(MacJesus)>로 유명한 미국의 램프리 시스템스(Lamprey Systems)와 비견될 만한, 매우 유니크하고 매력적인 문화적 실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외에 ‘푸른 사람들(www.blupers.co.kr)’의 작업과 최근 가나 웹 갤러리 (www.ganaart.com)에서 선보인 <명랑 음식점>과 같은 작업도 눈여겨 볼 만하다. 외국의 경우 미술관들이 전시와 연동하거나 또는 별도의 웹 아트 프로젝트로 인터넷을 통한 창작을 적극 기획·지원하고 있는데 비해, 아직까지 국내의 미술관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것 같다.

현실계의 축지법, 인터넷

넷 아트의 진정한 잠재력은 표현기법이나 대중적 전시 효과에 있다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한 리소스(resource)를 수집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즉, 웹을 통한 멀티미디어와 인터액티비티의 구현이 과거에 비해 한층 강력하고 손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대역폭의 문제가 큰 장애로 남아 있고, CD-롬과 같은 프로덕트형 미디어에 비하자면 여전히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 또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것 역시, 체험의 밀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양보를 전제로 한 것이다.


net3.jpg ▲ 센소리엄 센소리엄은 통상적인 인간의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거시적 운동이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보청기라 할 수 있다. 97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디지털 아트의 대표적인 국제 공모전 가운데 하나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지난 95년부터 넷 아트 부문을 신설하여 그동안 많은 넷 아트 작품들을 소개해 왔다.
반면에 넷 아트는 다른 어떤 표현 매체도 모방할 수 없는 굉장한 강점을 갖고 있다. 1997년 오스트리아 방송국이 주관하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www.aec.at) 공모전의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센소리엄(Senso-rium)>(www.sensorium.org)의 예를 들자면, 전세계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에 관한 정보가 매일 서버로 전달되어 웹 페이지의 지구 형상 위에 실시간으로 표시된다(‘숨쉬는 지구’).

그런가 하면, 웹 사이트의 IP(정보제공처) 주소를 인식하는 스크립트를 사용자의 컴퓨터 상에서 실행시키면, 사용자가 전세계의 웹 사이트를 서핑한 궤적이 실시간으로 지도 위에 표시된다(웹 호퍼). 그리하여 단순히 링크에 링크를 넘나드는 브라우저 상의 페이지 뷰의 경험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시 호주를 거쳐 브라질로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왕복하는 감동적인 축지법적 경험으로 재현된다. 이처럼 넷 아트는 종래의 미디어로는 생각할 수 없던 리소스를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로부터 실시간으로 수집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이른바 ‘연결의 마술’을 구사할 수 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전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클 더글라스의 <세계 최초의 공동문장>(math240.lehman.cuny.edu/sentence1.html) 같은 작품은 연결을 통한 실시간 생성이라는 전략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예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사실상 웹 사이트만 개설해 놓고 전세계의 아무나 여기에 접속하여 텍스트를 쳐 넣으면 마치 무한 증식하는 방명록처럼 뜻도 모를, 각국 언어로 된 문장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덧붙여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연결을 극대화함으로써 전통적 개념에서의 작가의 예술적 재능이나 관여의 폭은 극소화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우리가 작품의 개념으로 접수한다면, 이때의 작품은 프로세스로서의 작품인 셈이며 이 작품은 작가가 임의로 사이트를 폐쇄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계속될 진행형(ongoing)의 작품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테크노스피어(Techno sphere)>(www.technosphere.org.uk)처럼 예술과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혀 색다른 작품도 가능하다. 제인 프로핏이 설계한 이 사이버 스페이스의 생태계에는 수많은 인공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이 테크노스피어 사이트에 접속하여 주어진 몸체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생물을 조립할 수 있다.

이 생물들은 인간은 살지 않는 가상의 생태계에서 생로병사의 순환을 겪으며 쉼없이 나타났다 사라져간다. 이 작품은 지난해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에서 개최된 <이마지나리아(Imaginaria)> 전시에도 버전 2.0으로 출품되어, 과연 이것을 예술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을 야기시켰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제니퍼라는 여성이 집안 곳곳에 카메라를 장착해 놓고 자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심지어 목욕 장면부터 남자 친구와의 잠자리 장면까지)을 촬영하여 실시간으로 웹에 올리는 <제니캠(www.jennicam.org)> 프로젝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여성은 20대 초반의 평범한 웹 디자이너일 뿐이고, 명시적으로 이것을 아트 프로젝트라고 주장하는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제니캠 사이트는 가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나는 제니캠이 단순히 성공한 ‘이벤트’를 넘어, 어느 사진작가의 작품 못지않게 예술적·문화적 환기력이 큰 기념비적인 도큐멘트이자, 어떤 넷 아트의 작품보다도 절묘하게 인터넷의 핵심을 꿰뚫은 도전적인 기획을 했다고 생각한다.

노출과 관음, 센세이셔널리즘과 문화적 기획,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과 같은 주제가 모두 그 의미망 속에 얽혀 있다. <센소리엄>이 리소스의 수집원으로 네트워크를 이용했다면, <제니캠>은 거의 1인 방송적 관점에서 인터넷을 이용했다.

관객에 의한 생장 증식

<제니캠>을 예외로 하더라도, 이들 단 몇 작품만으로도 우리의 전통적 신념은 간단히 혼란에 휩싸여 버린다. 이런 혼란은 넷 아트의 어떤 점 때문에 초래된 것일까? 컴퓨터 테크놀러지의 도입으로 인해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한탄은 이 혼란의 본질적인 국면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사사로운 지적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영화에서처럼 미술에서도 예술이냐 오락이냐는 해묵은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체성의 문제는 좀더 본질적인 국면, 즉 작가와 작품과 관객이라는 가장 근간이 되는 삼각형 내에서 파열하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net4.jpg ▲ <테크노스피어> 사이트의 컨텐트들 유명한 인터넷 3D 채팅 환경인 알파 월드를 연상시키는 테크노스피어의 풍경들. 휴대용 다마고치 장난감 속의 생물들은 테크노스피어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서식지를 찾을 수 있다.

넷 아트에서의 작가의 정체성 문제는 해석학적 지평에서의 이른바 ‘저자의 죽음’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에 현실적인 예술적 생산관계로부터의 소원화의 경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가의 작업 모델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의 요구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 예술관객의 실종이라는 문제도 맞물려 있다. 요컨대 사이버 스페이스란 현실의 미술공간과는 사뭇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술가는 좀더 강하게 현실 미술계의 문맥에 밀착하려는 전략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인 미술 담론으로부터 과감히 이탈하여 새로운 역할 모델로 이동해 나갈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전시장과 거래를 중심으로 한 작가-작품-중개자-관객의 사슬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현저하게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넷 아트에서 작품이 존재하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형태, 곧 비트(bit)의 형태를 취한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아트의 존재방식이 그러하지만, 예컨대 설치와 결합된 형태의 미디어 아트나 인터액티브 아트와 똑같이 컴퓨터 테크놀러지를 이용했다고는 해도 확연히 구별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넷 아트는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이미지 세트와 프로그래밍 코드(스크립트)가 결합된 형태(물론 이미지만, 또는 코드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넷 아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품의 아이디어· 정보· 리소스 같은 기획적 측면과, 작품이 웹 사이트에 장기간 머물면서 관객과 반응하거나 생장 증식하는 프로세스적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보의 제어와 통신의 구조를 내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사이버네틱스로부터 개념을 차용한 사이버아트(cyberart : ‘cyber’라는 말이 원래 ‘가상의’라는 뜻보다는 ‘control’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의 개념이 어울릴 수도 있다.

넷 아트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다면 거기서의 작가란 전혀 다른 형태의 예술적 훈육을 요구하는, 이를테면 문화 기획자이자 정치 논평가이고, 때로는 특정한 하위문화의 이데올로그이자 선동가이기도 한 사람일 수 있다. 아울러 그(그녀)는 또한 스크립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멀티미디어 디자이너일 필요도 있다.



net5.jpg ▲ 알렉세이 슐긴 <레스크탑은> 러시아 웹 아트의 대표적 작가인 알렉세이 슐긴이 기획한 컴퓨터 데스크탑을 주제로 한 넷 이벤트 <데스크탑은 (Desktop Is)>. 전세계 사람들이 보내온 데스크탑 이미지 수 십여 점이 인터넷 상으로 전시되었다. 이처럼 넷 아트의 미술가는 곧 큐레이터이자 이벤트 기획자이기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면, 필자는 거칠게 말해서, 한국의 미술가들이 일반적으로 미술가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이 매우 강하며, 물질화된 작품을 선호하며, 장르와 미술사의 담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수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우리의 미술계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을 도입하는 데 있어, 어떤 가능성들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데 비해 다른 가능성들은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거나 용인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비디오 아트가 설치 형식으로는 활발한 데 비해 테이프 작업에서는 생각처럼 쉽게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맥락일 것이다. 그 결과, 컴퓨터 테크놀러지가 맥루한 식으로 말해 ‘쿨 미디어’로서의 강점이 많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한국의 디지털 아트는 (흔히 설치의 옷을 입고서) 핫 미디어의 시각적 매력과 임팩트로의 재빠른 방향 선회를 반복해 왔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넷 아트의 활성화를 위해 제안한다면, 이제는 과학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나 창작 도구의 관점에서만 아니라, 진정한 분과 및 직업세계간의 만남으로 기획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테크노스피어>의 경우 예술이냐 오락이냐의 문제를 떠나 인공생명이라는 과학적 견지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좀더 본격적으로 천착해 들어간 것이 알고리듬 아트이다. 21세기가 생물학의 시대라고 예견된다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알고리듬을 생성하는 이 알고리듬 아트야말로 진정 미래에 값할 만한 예술 형식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창작과정에서의 프로그래머와 미술가의 실질적인 협업도 절실하다. 이런 종류의 협업이 성공적인 예로는 로리 앤더슨과 신 치엔 후앙간의 협업을 들 수 있다. 이들 콤비는 도판에 소개한 (www.stedelijk.nl/capricorn/anderson)라는 인터넷 작품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꼭두각시 여관(Puppet Motel)>이라는 유명한 멀티미디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런 협업은 사실상 미술관이나 전시 기획자 같은 공적인 채널을 통해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 기관들의 웹 아트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터넷 환경이 일반화된 지금, 넷 아트에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공 미술이라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유남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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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22:37

로이 애스콧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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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의 창조적 생명성을 찾아”

당신은 60년대부터 ‘사이버네틱스’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즈음과 그 후의 활동에 대하여 묻고 싶다.

60년대에 예술계의 관심은 플럭서스와 퍼포먼스 등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성에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학생이었고 후기인상파인 세잔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이동하는 시점과 자연 속의 유전(流轉)과 같은 주제에 탐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세잔의 구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유전하고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감상자측인 것이다. 또한 그 시기에 나는 F. H. 조지의 이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로잔 브래트의 ‘인지(認知)’라는 발상에 근거해 신경망의 극히 초기적 구상을 바탕으로 뇌의 모델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전개했다. 이 이론은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사이버네틱스라는 과학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일생에 몇 번 있을까말까 한 영감을 얻고, 예술 발전의 기초가 될 씨앗으로서의 이론적인 근거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사이버네틱스의 모든 영역에 뛰어들어 참가와 인터액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60년대에 관심을 가졌던 사이버네틱스가 실제로는 거의 미개척 분야였던 것처럼, 바이오 텔레마틱이나 나노테크놀러지, 모이스트 미디어, 그리고 재물질화와 같은 영역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가 활동하게 될 곳은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한다.

그후에 당신이 기획한 <텍스트의 주름>(1983)과 <가이아의 양상〉(1989)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디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80년대에 들어 <Terminal Consciousness>에 참여한 뒤, F. 포페르로가 기획한 <엘렉트라>에서 작품제작을 제의받았다. 프로젝트의 타이틀인 ‘텍스트의 주름’은 롤랑 바르트에서 유래한다. 즉, 바르트가 말한 ‘텍스트의 쾌락=pleasure’로부터 ‘텍스트의 주름=plissure’에 도달하게 된 것인데, 중요한 점은 내가 60년대로 되돌아가서 예술작품에 있어 감상자는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감상자와 작품의 상호작용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투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전세계에 작가를 배분하고, 전지구적인 동화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했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답이 된 것은 1989년의 <아르스 엘렉트로니카>에서의 시도였다. 곡선 형태의 건물과 화단 밑의 터널이라는 공간을 사용하여 <가이아의 양상>이라는 프로젝트를 행하였다. 테마는 시공간의 만곡과 가이아(GAIA), 즉 대지의 여신이다. 나는 먼저 전세계의 1백명 이상의 예술가·시인·과학자·샤먼·음악가·건축가·호주 원주민·미국 인디언 예술가들에게 지구에 관한 화상이나 텍스트·시를 보내줄 것을 의뢰했다.

이 행사에 마련된 인터페이스는 2종류였다. 하나는 전시회장의 2층에 수평으로 늘어선 일련의 스크린으로, 관객들은 마치 대지를 내려보듯이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스크린에는 네트워크로부터 내려받은 화상이 투영되고, 관객은 마우스를 이용해서 그 화상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거나, 목소리에 반응하는 노이즈 센서를 이용해서 화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전부 수작업으로 화상을 보내거나 지우고, 변조된 화상을 원래의 것으로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인터페이스는 ‘가이아의 자궁’이라고 불리는 데이터 터널이었는데, 건물의 화단 밑에 철도의 선로를 깔고, 관객은 정신과 의사가 사용하는 긴 의자에 환자처럼 누워서 암흑 속을 이동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에게는 40개의 전광판에 시와 정치적인 텍스트가 스크롤되는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세계에서 보내오는 갖가지 텍스트 속을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주고받는 정보의 통합체가 또 하나의 생명체라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 20세기에 들어 과학과 테크놀러지는 예술을 혁신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당신은 이를 통하여 예술의 컨텐츠의 성격과 내용까지 변하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관련해서 예술의 미래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애스콧: 테크놀러지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환경이다. 또한 테크놀러지는 욕망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강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텔레파시로 의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 늘 지녀오던 것이었다. 고대문명이나 현대의, 예를 들면 브라질의 샤먼도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텔레프레젠스를 송신할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아전인수격의 설명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날에 스크린 위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 인공생명을 내포한 실리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매체는 변화하고 있고 환경 또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정신, 즉 무엇인가를 실현 혹은 이해하고 스스로 변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세기 디지털 아트의 흐름을 개관할 때, 그 기원은 오히려 뒤샹이나 마리네티와 같은 사람들의 고유한 의미와 접근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는 극히 광범위한 갖가지 전략을 창조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3개의 기본적인 미학적인 좌표가 있다. 그중 하나는 테크노에틱스인데, 이것은 의식의 테크놀러지와 내가 사이버셉션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인공생명, 이것은 자연의 창발(創發)과정을 적용하는 모든 것, 마투라나와 발레라가 오토포에시스라고 부르는 과정의 모든 구체적인 예를 포함한다.

세 번째로 인텔리전트 건축, 즉 적응과 예측을 행할 수 있는 인공의식을 지닌 환경시스템 내지 구조에 관련된 모든 것, 이것들은 첨단 과학의 연구에도 중심이 되는 문제다. 거기에는 의식의 문제가 모든 측면에서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과학적인 은유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

금세기의 서양예술은 테크노에틱 문화에의 길을 구축해 왔다. 뒤샹의 아이러니한 과학만능주의로부터, 타틀린의 공학적 낙관주의,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기술적인 역동주의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예술의 근저를 이루는 창조행위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은유에 대한 찬미와 테크놀러지의 잠재력에 대한 신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컴퓨터 과학과 첨단기술이 예술의 실천에 가져온 충격이나, 양자물리학 또는 사이버네틱스의 은유가 예술이론이나 문화 이해에 끼친 영향은 재삼 거론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현재 테크놀러지 자체가 생물공학이나 생체전자공학과 같은 생물학에의 지향성을 강화해감에 따라, 예술 또한 스스로 발생이나 공진화(共進化) 혹은 오토포에시스의 문제를 내포하게 되었다.

인공생명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생명은,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진 콘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는 형태로 파악된다. 거기서 생명이란 조직화된 물질의 특성이기보다는, 물질의 조직화 그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인공생명의 핵심이 되는 개념은 창발적인 몸짓 (behavior) 이다. 자연의 생명은 방대한 양의 무생명체인 분자가 행하는 조직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창발한다.

C.랭턴에 의하면, 거기에 전체적인 컨트롤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부분의 ‘몸짓’ 전체에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부분이 ‘몸짓’ 그 자체이며, 개개의 ‘몸짓’의 국소적인 상호작용의 전체로부터 창발되는 몸짓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으로서의 인공생명과 상호작용적 예술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어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샤머니즘적 의미론과 ‘벌레구멍’의 은유에 대하여 말해달라.

고대의 무당은 일종의 의식의 벌레구멍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의 장벽을 마음대로 넘어다닐 수 있었다. 이 은유는 고대 샤머니즘 전통에서의 예술의 기원을 오늘날 인터넷에 있어서의 예술 내지 미래의 시공 항해에서의 예술과 연결지을 것이다. 텔레마틱한 링크 내지 인터넷과 같은 하이퍼 미디어에 있어서 현대의 우리들은 벌레구멍을 통하여 갖가지 사이트나 노드(node, 매듭·파절·중심점)로 간편하게 드나들 수 있고, 이미지나 텍스트·장소나 사람들 사이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벌레구멍이란, 양자(量子)의 껍질(막)을 관통하는 터널이며, 공간의 토폴로지에 있어 아득히 떨어진 우주공간의 두 장소를 이어주고, 또 다른 조작을 하면 하나의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혹은 현실의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사람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양자의 껍질을 관통하는 터널’이란 이론적인 가설일 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웹(web)에 있어서 내가 데이터의 껍질이라고 부르고 있는 터널을 통하여 하이퍼 링크된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 하나의 텔레프레젠스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 나아가서는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이동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벌레구멍과 같은 터널을 통한 이동은 거시적인 우주와 미시적인 의식이라는 두 개의 레벨에 있어 ‘몸짓’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는 은유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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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애스콧 <미디어 아트 작가·영국 웨일즈대 교수>


21세기 미술을 예견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아닌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의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디지털화되어 가는 미술의 비물질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 로이 애스콧은 이는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21세기 디지털 세상은 인공 생명체나 연결 의식, 또한 ‘모이스트 미디어’로 불리는 생물학적 텔레마틱 개념이 도입되면서 다시금 물질화의 경향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우선 예술이 ‘가장자리’에 처해 있다는 제목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 싶다. 이 말은 예술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인터넷의 앞머리와 텔레마틱 시스템의 뒷부분이 만나는 두 영역간의 만남과 겹침, 그리고 전이를 강조하기 위한 긍정적 의미를 띠고 있다. 즉,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소통과 전달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예술의 구조적 변화를 넘어서서, 그 컨텐츠의 성격과 내용까지 변하는 근본적 패러다임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상호작용 예술(Interactive Art)의 가장 두드러진 다섯 가지 특징을 말해본다면, 그것은 접속성·몰입·상호작용·변형·발생이다. 여기서 ‘접속성’은 개인, 혹은 시스템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인터넷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몰입’은 사용자가 멀리서도 몰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가상현실에서는 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사용자의 몰입에 반작용이 있는 것이 ‘상호작용’이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예술에서는 이미지와 시스템·구조·환경이 모두 변하는데, 그중에서도 사용자의 의식 ‘변형’이 가장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발생’은 사용자들이 시스템을 통해 볼 수 있는 시각적 발생물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 패턴과 환경의 도래와 함께 요구되는 신조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테크노에틱스 (technoetics)’는 어원상 기술과 정신의 희랍어에 각각 해당하는 ‘noetic’과 ‘nous’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런 정신(con - scicousness)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된 예는 단순히 근대적 관점에서 찾기보다는, 고대 의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테크노에틱스의 관점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물질과 기술적 측면으로만 기우는 위험을 피하고 인간 정신의 총체적 표현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적 자세에는 새로운 성격의 미디어의 도래가 필연적인데, 나는 이 새로운 미디어의 특징을 지적하여 ‘모이스트 미디어(Moist Media)’ 라고 부른 바 있다. 이 미디어는 디지털예술에서 볼 수 있는 ‘유선의(wired)’, 그리고 ‘건조한(dry)’ 세상과 생물학적 (bio-technology)이고 유기체적인 ‘젖은(wet)’ 세상이 합쳐지면서 탄생한 개념이다. 즉, 지난 20년간 예술이 줄곧 루시 리파드가 말한 ‘비물질화’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면, 향후 10년간의 예술은 재물질화(rematerialization)로 전개될 것이다.

이 모이스트 미디어는 여러 형태나 의미·경험이 텔레마틱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은 분자 구조 형태로 존재하게 해줄 것이며, 이런 현상을 본인은 ‘생물학적 텔레마틱스의 출현 (Bio-telematics Emergence)’ 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모이스트 미디어는 디지털 시스템의 정보 단위인 비트와 생명체의 원자·신경·유전자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모이스트 미디어의 출현과 새로운 예술이 도래한 결과, 필연적으로 예술과 건축과 같은 분야간의 경계가 없어지고, 각 분야의 원칙들은 모두 통합될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학습의 패턴이 요구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주의 에드워드 쿼크의 작업은 살아 있는 조직체의 생성 구조를 가지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이루어지는 작업인데, 그의 작품은 수소 원자 구조를 소위 벅키 볼(Bucky Ball)이라고 불리는 인공 피스톤 형태 속에 넣어 재구성하여 수소 원자 구조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10∼15년 내에 나노테크놀러지의 발전에 의해 예상되는 예술의 한 예라고 할 것이며, 물질 구조를 극소 단위까지 접근하여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이제부터는 미디어의 변형에 따라 계속 부상될 것이 예상되는 몇 가지 개념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25년 전에 가상 현실이나 기타 디지털 기술이 실현되기 전에 텔레프레센스를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양자 컴퓨테이션과 양자 텔레포테이션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양자 텔레포테이션이란, 한 개체의 양자가 다른 개체로 전자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하며, 1997년 로마·인스브룩·칼 테크의 실험실에서 처음 실현되었다.

사이버와 현실의 공간접촉

내가 일하고 있는 리서치 센터인 CAiiA-STAR 는 질 스코트(Jill Scott), 피터 앤더스(Peter Anders), 돈나 콕스(Donna Cox), 나오꼬 토사(Naoko Tosa) 등을 배출했다. 이들은 현재 상호작용 예술·건축·무용·공연 예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UCLA의 디자인과 학장으로 일하고 있는 빅토리아 베스나는 공간 중에 기제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것을 ‘정보를 담은 인간(Information Personae)’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네트상에서 벌어지는 정보 활동에 의해 구조가 결정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베스나는 이러한 인간의 예로 벅스민스터 풀러를 지적하여 그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풀러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공상의 아이디어를 공학과 건축으로 실현시킨 계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21세기를 앞둔 시점에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그려보는 데 풀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풀러의 이론과 업적은 디지털 문화에서 자료와 정보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ATR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소머러와 미뇨노의 작품 <발브(A Volve)>는 90년대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부각되었다. 이 작품의 관객, 즉 사용자가 모니터 위에 그림을 그리면 시스템이 그 모양의 살아 있는 생물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들은 물 안에서 움직이면서 사용자의 손동작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서 각자 독립적인 생명체로서의 생명 주기를 그리면서 서로 잡아먹거나 교미하며 죽기도 한다.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에서 생명체에 대한 개념도 많은 진척을 보았는데 이 글 그 내용을 깊이 소개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생명체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그 미세 단위인 살아있는 작은 형태의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여 생명체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 하는 문제들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생명체와 인공생명체에 대한 여러 발견에서 예술가와 건축가·디자이너 등에게 시사되는 점은 예전의 ‘위부터 아래로’ 진행하는 디자인의 패러다임이 이제는 ‘아래로부터 위로’ 변하고 있다는 방향의 변화다. 이 변화는 예술가들에게 디자인의 진화 과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대신, 형태가 자연스레 진화될 수 있도록 씨를 뿌리는 사람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드와르 켁의 작품은 종(種)간의 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미국 서부에 있는 나무와 미국 동부에 있는 새를 텔레마틱 시스템으로 연결하여 새의 노래와 식물의 성장이 일정한 기호 데이터로 전달, 해석되어 상호 성장과 감정을 교환하게 하였다. 혹은 박테리아로 한 작업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해 박테리아 조직이나 세포의 정보를 바꾸기도 하였다.

척 데이비스는 특별히 고안된 접속 매체를 사용하여 인체의 내면 구조나 메커니즘에 따라 개인이 가상공간에 몰입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관객이 마구처럼 생긴 장비를 머리에 쓰면, 그의 호흡에 맞춰 가상공간 중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다. 가령, 숨을 들이쉬면 시야에 보이는 가상공간에 본인이 뜨는 장면을 보게 되고, 숨을 내쉬면 몸이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경우는 관객이 몰입과 상호작용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이루어지는 등 밀접하고 친근한 장점이 있다. 텍사스 대학에서 트랜스건축(Trans-architecture), 혹은 액상건축(Liquid Architecture)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개척·탐구하고 있는 마르코스 노벡의 목적은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진 형태로 사이버 공간과 현실공간 사이의 접촉이 가능한 새로운 종류의 건축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상 공간을 위한 의식전환이 중요

다음은 본인이 브라질 비엔날레에서 최근 출품한 웹 작품인 <예술의 ID/사이버 ID>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모니터에는 참여한 예술가들을 의미하는 정사각형 로고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모호하고 주관적인 작가들의 정체성을 같은 준거 기준으로 측정하여 한자리에서 비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을 위해 먼저 나는 초대된 작가들에게 84개의 주요 단어 목록을 보여주고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9개의 단어들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 선택된 단어들로 그에 연결된 이미지 데이터들이 뜨게 되면 각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말해주는 9개의 이미지, 음향 데이터 조합을 받게 된다. 그 이미지들을 누르면 다른 종류의 음향과 이미지들이 몇 단계에 걸쳐 열리며 사이버 공간상에서 정체성을 풀어 설명해주는 것이다.

텔레마틱 연결망은 본질적으로 개개인 정신간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우리가 텔레마틱 연결망(mind on line의 상태)상에 의식을 분산시키면 인간 두뇌의 주성분이 지닌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최근 MIT Media Lab에서도 실험한 바 있는 공간 제한을 넘어선 컴퓨팅 개념 (Ubiquitous Computing) 과도 같은 상황으로서, 여러 시스템과 장비들을 이용해 상품·환경 등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 인간의 의식이 고루 분산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배경하에서 예술가들은 생물학적 텔레마틱스라는 매트릭스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환경에서는 본인이 ‘hypercortex’ 즉, ‘하이퍼 대뇌피질’이라고 명한 분산된 의식 상태가 요구된다. 이 의식은 그것을 담는 적절한 ‘하이퍼 신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 또한 인간의 의식을 재고하여 새로운 분산된 의식 상태를 이끌어낸 것에 비견되는 신체에 대한 재고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재고와 발견이 가능한 미래의 예술은 전통적 영역만을 고집하는 순수예술에 비했을 때, 아마도 더욱더 ‘미묘한 예술’로 보이게 될 것이다. 예술로서 미묘하다고밖에 불릴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생물학, 예술, 인간의 의식 연구, 인공생명, 공학, 신비주의, 컴퓨터 과학 등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상이한 분야들이 미세한 고리로 모두 연결되어있는 종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분산된 의식을 갖는 예술가들이 연결망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여 이들은 자연히 본인이 칭한 바 ‘telenoia’라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방되고, 포용적이며 협조적이고 건설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온 지구상의 개개인들이 의식을 분산시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환영하는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이 사고방식은 19세기적 산업시대의 편집증적 성격(paranoia)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도출된 것이다.

또한,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술가들이 개념(conception)을 잡는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될텐데, 본인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의 개념을 사이버 개념(cyberception)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기술은 단순히 어떤 문제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지방법, 즉 생각하는 방식이나 시스템 차원의 변화를 야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인지방법을 총체적으로 사이버개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소 해부학이나 존재론적인 영역도 포괄하면서 신종 사이버 인간의 주요한 새 신체 기능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제 예전의 자연 대신 새로운 제2의 자연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삶의 발전을 자연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기엔 충분하지도 않고 또 그 속도가 너무 느리며,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진화 과정에 적극 개입하며 주어진 유전자 환경 이외의 변수들을 반영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찍이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가 내린 현실(reality)에 대한 분석은 예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현실은 더 이상 주어진 완성체가 아니라 보는 이가 이해하기 쉽게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은유(metaphor)들로 가득 차 있는 기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당 기존의 언어나 제도 같은 은유들에 의혹을 갖고 적극 개입해 점검함으로써 자신만의 은유들로 현실을 다시 표현해내는 것만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인 브라질 철학자 로베르트 망가베이라 웅거(Roberto Mangabeira Unger)가 예술가의 중요 역할을 변형적 저항(Transformative Resis - tance)으로 정의한 것은 로티의 현실 의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임이 분명하다. 예술가의 변형적 저항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미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부연하자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지적·창의적 개척 활동에서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우리가 다루게 되는 공간은 르네상스부터 지난 20세기까지 줄곧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던 유클리드적 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이다. 유클리드적인 공간이 시점이나 원근법 등 우리의 몸을 단위로 측정해온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몸과 분할, 확실성과 같은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면, 사이버 공간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신·불확실성·연결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 예술가나 철학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무엇으로, 해석자의 은유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 현실의식은 텔레마틱 시스템이 생물체처럼 발생· 증식· 성장해 가는 변화 진행중에 있다는 점, 즉 텔레마틱 시스템이 생물학적 재물질화 추세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시스템이 응용된 모든 분야는 지금껏 우리가 알아온 방식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의식 전환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미디어로 설계한 건축은 보는 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고하고 느끼며, 보는 이의 반응을 반영한 후 자신의 반응도 되돌려줄 수 있는 건축이 될 것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이 들어선 도시 자체는 새로운 형태의 의식과 후기 생물학적 개념이 도입된 사회 구조를 표현해주는 하나의 거대한 매트릭스가 될 것이다.

심령세계와 사이버 공간의 텔레마틱 미디어

텔레마틱 미디어는 기존의 과학과 달리 ‘이중의식(Double Con - sciousness)’이라는 정신상태를 허락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데, 서로 차원이 다른 두 장소에 의식이 동시 분산 병행될 수 있는 상태다. 간단히 예를 들면 의사가 수술을 할 때, 특수 장치를 부착한 한쪽 눈으로는 환자의 몸 안쪽을 살피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의 육안으로는 몸의 표면을 보면서 수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즉, 텔레마틱 미디어는 과학에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심령 세계와 사이버 세상의 교접을 가능케 해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중의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진정한 상호작용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작품과 관객, 관객과 사이버 공간 혹은 관객과 가상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 이중의식의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부지런히 손과 발만을 이용해 단순 조작하는 상호작용은 다른 제3의 관객에게는 한낱 스펙터클로만 그치게 되는 수가 많다.

대부분의 미술관 전시에서 상호작용 예술작품이 단순한 스펙터클 쇼로 전락하고 마는 이유는 관객이 작품 앞에 얼마나 모이건 상관없이 개개인의 내면까지 깊게 닿을 수 있는 진정한 차원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러한 상호작용은 오히려 미국 원주민들이 초혼의식 중에 빠지는 몽환적 상태에 더 가까운 일종의 ‘연기(enactment)’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기는 퍼포먼스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생물학적 미디어 즉, 모이스트 미디어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의식과 예술 전반에 걸친 가치 변동을 위의 표 형식을 빌어 요약하고자 한다.

 

 

번역 이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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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월간미술 뉴 밀레니엄 특별기획에 기고된 심광현교수의 전문 내용입니다.

 

 

 

art1999.jpg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이후, 20세기 미술은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으로 일관해 왔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비평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게 된 일련의 흐름은 새로운 비평 영역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세기의 전환을 앞둔 지금, 모더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구조주의에 자신의 공백을 내어놓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 역시 모더니즘의 공백을 채우지는 못하였다.

 


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비평적 행위다.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대신 행위의 ‘대상’에 대한 반성과, 반성의 근거와 방법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데에, 말하자면 어떤 행위와 행위의 대상을 ‘메타화’한다는 데에 비평적  행위의 특징이 있다면, 미술비평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메타화’ 방식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미술비평의 역사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나타나는 어려움의 하나는 20세기 미술의 역사 자체가 이미 이와 같은 ‘메타화’방식의 역사였다는 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출품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이래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합의된 ‘미술작품’의 개념을 전제했던 과거 미술의 역사와는 달리 ‘매번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려는 노력들’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창작 행위의 주안점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재정의한다”데에 놓여 있다면, 창작과 비평의 전통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창작 자체가 매번 일련의 비평 행위가 된다.

20세기 미술에는 미술작품은 없고 미술에 관한 담론(painted word)만이 무성하다는 비판(톰 울프)은 이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함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이런 현상은 역으로 ‘비평 영역의 확장’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에서의 비평에는 ‘미술행위에 대한 비평’만이 아니라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함께 포함될 수 밖에 없고, 바로 이런 지점에 주목할 때라야 20세기 미술비평이 그 이전과 구별되는 중요한 분수령이 포착되지 않을까 싶다.

뒤샹이 제기했던 바와 같은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이 골치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미술을 대할 때, 통상은 문제시 되지 않았던 ‘미술작품’의 개념이 곧바로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술을 ‘감상’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이 감상하려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감상’이라는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주어진 문제를 풀려고 공식을 찾는 사람에게 문제란 무엇인가를 되물음으로써 ‘공식’의 중요성을 해체하는 것과 비슷하며, 문제를 ‘푸는’행위의 의미를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의 맥락 속에 재배치하는 것과 비슷하다. 1962년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문제 ‘풀이’행위의 암묵적 기반이 되고 있는 문제 ‘제기’의 맥락적 배치를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개념화시킴으로써 이런 메커니즘을 ‘명시화’한 바 있다.

비교하자면 ‘비평적 행위로서의 미술’은 문제 ‘풀이’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패러다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로잘린 크라우스가 <조각 영역의 확장>이라는 글을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황에서의 제작이란 제한된 매체-조각이라는 것-에 관련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련의 문화적 개념에 의한 논리적 운영”에 연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마르셀 뒤샹의 문제 제기를 60여 년이 지나 개념적으로 명시한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제작의 초점은 매체나 표현 양식의 수준(문제 풀이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문제 제기) 수준에 놓여 있다는 것인데, 이를 매체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은 마치 뒤샹의 ‘변기’자체의 작품성과 미학적 특질을 감상하려는 것과 같은 ‘오해’를 유발할 뿐이다.

행동주의 - 소통·참여의 과정

모더니즘이 매체의 순수한 물질성과 형식성을 중심으로 닫혀진 미술작품의 개념을 전제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이 문제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닫혀진 미술작품의 개념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 은 매체에서 ‘장’(field)의 차원으로 비평의 초점을 이동시킴으로써 모더니즘 비평이 혼란스러운 절충주의라고 매도했던 많은 작업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린 공간이 사실상 절충주의의 ‘합리화’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비평적 기준이 새롭게 마련될 수 있는가? 매체(의 물질성과 형식성) 중심의 패러다임의 붕괴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의 논리적 운영의 기준은 무엇인가?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즘 비평은 이런 기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다임 논쟁에서 엇나가는 또 다른 축이 존재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적 미술, 행동주의 미술과 연계된 비평적 쟁점이 그것이다. 때때로 이 쟁점은 ‘리얼리즘’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정치적 미술, 행동주의 미술의 오랜 전통은 장르적·매체적 기준에 의해 한정된 양식적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년대의 하트필드식, 60년대의 팝아트적인 ‘정치적 모더니즘’을 환기해 보라).

미국의 대표적인 행동주의적 페미니스트 비평가인 루시 리파드나 영국의 존 A. 워커와 같이 정치적 미술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의 작업이 초점을 두는 지점은, 특정 매체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미학적 효과를 중시하고, 개인적인 체험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소통의 일부로 작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정치적 미술, 또는 행동주의 미술의 본질은 특정 장르나 매체의 관습이나 양식에 한정된 닫힌 작품 개념이 아니라, ‘소통하고 참여하며 함께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70년대부터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자이자로서 다수의 이벤트들을 기획해왔던 수잔 레이시는 95년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라는 제목의 책을 편집하면서, 지난 30여 년간의 행동주의적 미술의 성과를 기존의 제도 공간에서 행해진 환경 조형물로서의 ‘공공 미술’과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에 의하면 이 개념은 관객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쟁점들을 가지고 관객들과 소통하고 상호작용하기 위해 전통적인 매체와 새로운 매체 양자 모두를 사용하는 참여적인 시각예술을 총칭한다.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는 작가는 사적 체험의 경험자이자 리포터로서, 또는 분석가이자 행동주의자로서 다양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관객 역시 능동적인 참여자에서부터 역사적인 회상자에 이르는 다양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인 매체의 경계로부터 벗어난 미술을 지칭하기 위해 60년대 후반부터 사용된 ‘새로운 장르’라는 개념과, 내재적으로 사회적인 ‘개입’의 성격을 지닌 ‘공공 미술’개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개념은 위에서 말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개방한 ‘열린 작품’의 다원적 공간에 일련의 방향성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글로벌·로컬의 이중화

20세기 서양의 미술과 미술비평이 실제로 어떤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는가의 문제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응용했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서양에서는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상이한 패러다임들이 비록 앞의 두 축의 지배적 우위 하에서이긴 하나 경쟁적이거나 상호 침투적·접합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반면, 우리의 경우는 1920∼30년대의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우 오랫동안 정치적 미술의 패러다임은 서구미술 및 미술비평의 수용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되었고, 3자의 역동적인 관계는 거의 조망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미술 수용사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고, 정치적/ 행동주의 미술의 패러다임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기 시작된 것은 80년대 초기 민중미술운동의 발화를 계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의 격렬했던 정치적 상황은 초기에 최민·성완경 같은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가능성들을 문화적인 맥락에서 치밀하게 검토할 반성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80년대 말에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 논쟁의 과도한 영향 속에서 도식적인 리얼리즘 양식론의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비평적 초점이 패러다임 수준에서 매체와 장르 중심의 닫힌 작품 개념의 수준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위 ‘제도권’의 일부 미술비평가들 사이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수용이 이루어졌지만, 이 역시 문화적 개념들의 논리적 운영이라는 차원보다는 양식상의 비교 수준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철저한 오독을 야기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서양의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입체적인 궤적이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이며, 이 과정에서 ‘패러다임’‘담론적 배치’‘문화적 개념들의 논리적 운영’과 같은 수준에 대한 인식이 비로소 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9년에 결성되었다가 93년 초에 해체한 미술비평연구회의 활동에서 이와 같은 80∼90년대로의 이행기의 한계와 성과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미술행위의 문화정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페미니즘과 문화 연구, 후기 구조주의 철학 등의 수용 과정에서 가속화되었지만, 이런 인식의 세련화는 논쟁적 열기를 수반하지는 못했고, 다만 도시·대중매체·섹슈얼리티·젠더·에콜로지 등을 주제로 한 일련의 기획전시회들을 통해 소단위별로 분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서 95년 광주 국제 비엔날레의 개시를 전후로 국제 교류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서서히 부각되고 있는 쟁점의 하나가 ‘글로벌/로컬’((global/local)의 이중화 문제다.

위와 같은 기술이 20세기 미술비평의 국내외적 흐름의 전모를 조망해줄 수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미술을 이끌어온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지배적인 미술제도의 틀 안과 밖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정치적/행동주의의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나아가 정치적/행동주의 미술의 전통은 본래가 매체가 아니라 ‘참여와 소통’이라는 문화적 맥락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미술=리얼리즘 양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해야 한다.

둘째, 철저하게 사적인 경험과 닫힌 작품 개념에 기반했던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붕괴로 나타난 공백을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의 개인주의 문화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형(탈중심적이고 복수적이면서도 네크워크식으로 연결되는 공생체적인)의 문화적 공공 영역을 가능케 하는 계기로 활용할 것인가의 여부다. 포스트 모더니즘·포스트 구조주의가 답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며, 바로 여기서 창조적인 역할이 적극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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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과학쟁이 12월호 프랙탈아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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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204-3_mobilos.jpg

제 작품 4점이 소개된 과학쟁이 12월호 입니다.

프랙탈을 이용하여 예술을 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반복이라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 프랙탈 이미지를 예술가의 손으로 의미를 주어 새로운 느낌으로

가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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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프랙탈정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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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에 보이는 저 넘어로
10_mobilos.jpg
 
제목 : 프랙탈 먼지
fracta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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